농교육의 쟁점과 과제: ‘5W1H’론과 한국 농교육
김병하(金炳廈)
대구대 특수교육과 명예교수
(한국특수교육문제연구소 상임고문)
머리말
농교육은 특수교육 분야에서 가장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다. 오늘날 농교육은 특수교육계 내부에서조차 또 하나의 마이너리티 그룹으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그 특수성이 강한만큼 짚어야 할 쟁점은 여전히 풍부하다. 그래서 농교육이 풀리면 특수교육이 풀리고, 특수교육이 풀리면 모든 교육이 풀린다. 여기서는 농교육의 쟁점을 왜(why), 누가(who), 어디에서(where), 무엇을(what), 어떻게(how), 언제(when)라는 순서로 소위 ‘5W1H’론에 입각하여 논의해 볼 것이다.
‘Why’에서는 농교육의 목적론을, ‘Who’에서는 농교육의 주체성을, ‘Where’에서는 농학생의 교육배치를, ‘What’에서는 농교육의 내용론을, ‘How’에서는 농교육의 방법론을, 그리고 ‘When’에서는 농인의 평생교육을 각각 논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5W1H의 논지다. 필자는 이 5W1H의 논지에 따라 21세기 한국 농교육의 과제를 세 갈래로 짚어 볼 것이다. 즉, 그 하나는 농교육에서 ‘학습자 중심(learner-based)’교육이 진정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 둘은 농교육에서 심성함양으로서 교과교육 정립과제를 짚어보고, 마지막으로 농(인)학(Deaf studies)의 관점에서 본 한국 농교육의 개선 과제를 제기할 것이다.
Why: 농교육의 목적은?
인간의 문제는 결국 마음의 문제다. 그래서 교육은 심성함양(心性涵養)이다. 농교육은 농학생의 심성함양에 관여하는 만큼 교육적이다. 우리는 오늘의 농교육이 ‘마음 안’의 문제를 겨냥하는지 ‘마음 밖’의 그 무엇에 꺼둘리고 있는가를 엄중히 짚어 봐야 한다. 교육이 목적 그 자체(즉, 교육의 내면적․본래적 목적)에 충실하고자 하는지, 아니면 목적을 빌미로 한 수단에 종속되는 것을 정당화하는지를 따져 봐야 한다. 맹자(孟子)는 어떤 경우에나 목전의 이익을 염두에 두고 하는 일은 도(道)에 어긋난다고 했다. 『중용(中庸』에서는 이 도를 닦는 것(修道)이 곧 교육이라 했다. 그리고 이 도(道)는 하늘의 지엄한 명령(즉, 天命)으로 모든 인간에게 품부된 본래성(本來性)에 따르는 것이라 했다. 이처럼 교육의 길(목적)은 엄중하다. 때문에 교육은 우리가 자의적(恣意的)으로 이리저리 마음대로 그 길(way)을 바꿀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목전의 이익에 끌려 교육을 이리저리 바꾸는 동안 어김없이 교육 본래의 목적이 실종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일반교육은 ‘점수병’에 걸려 있고, 농교육은 ‘말훈련’ 환상에 빠져 있다. 그러니 교육 본래 목적은 실종될 수밖에 없다. 점수는 출세의 측도이고, 농교육에서 ‘말하기’는 정상화 혹은 표준화의 강요다. 농교육이 교육다운 것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심성함양’을 위한 교육본질 복원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농교육에서 교육본질 복원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일차적 책임은 그 교육을 담당하는 교사의 손에 달려 있다. 왜냐하면 교육본질 복원은 원칙적으로 교사들이 운영하는 교육과정을 통해 가능하기 때문이다. 『중용(中庸)』에서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로 교육을 규정한 것에 비추어 볼 때, 이 도를 닦는 ‘修道’는 요즘 말로 하면 ‘교육과정계획과 운영’에 해당된다. 교육과정은 심성함양을 위한 도구이자 매체(내용)이지 점수 따기의 요령이 아니다. 그리고 이 ‘도’(道)는 잠시도 나를 떠날 수 없는 마땅한 길(way)이다. 『중용』에 의하면, 교육은 ‘성’(誠)하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품위 있는 삶의 과정(過程; process)이다. 그래서 지극한 정성으로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스스로의 인격(人格) 변화는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인격적 감화(感化)를 안겨 준다.
심성함양을 위한 교육에서 교사는 학생들을 여래(如來)의 땅으로 안내하는 진여(眞如)의 화신(化身)이어야 한다. 『중용』에서는 “지극한 정성이라야 자기의 타고난 성(性, 즉 본래성)을 온전히 발현할 수 있고, 자기의 타고난 성(性)을 온전히 발현할 수 있게 되어야 타인의 성(性)을 온전히 발현케 할 수가 있다.”(22장)고 했다. 그래서 “지성이래야 능히 화(化)할 수 있다.”(至誠能化)고 했다. 여기 ‘화’(化)는 인격적 ‘감화’(感化)와 같은 의미다.
필자가 보기에 『중용』의 이 말은 농교육에서 교사론의 백미(白眉)다. 이것이 교직의 본래 성격이자 교사의 운명이다. 이 운명을 거역할 교사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교직의 본래 사명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교사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다만 그렇게 살고자 부단히 헌신하고 노력(소위 誠之의 삶)할 뿐이다. 그러는 동안 (농)교육의 내재적 목적은 조금씩 현실화된다. 그래서 교육은 이상의 현실화 과정이다. 『중용』의 가르침에 의하면, 교육은 ‘성’(誠)의 과정이고, 이 성(誠)은 ‘화’(化)의 과정으로 이어진다.
Who: 농교육의 주체는 누구인가?
두 말할 나위도 없이 교육의 주체는 아동학생과 그 교육을 이끄는 교사다. 과연 한국교육의 냉혹한 현실에서 교육 주체가 주체로서 주인노릇(隨處作主)을 제대로 하기나 하는가? 또 주체로서 대접을 받기나 하는가? 여기 ‘냉혹한’ 교육현실은 ‘가혹한’ 교육경쟁체제 혹은 학벌 이데올로기를 지칭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게다. 달리 말하면 오늘의 한국교육에서 학생과 부모는 ‘점수병’에 걸려 있고, 교사는 ‘점수 제조기’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출세는 학벌체제로 엄격히 서열화(일렬화)되어 있다. 농교육은 이런 경쟁체제에서 조차 국외자(exceptional children)로 몰리니 아예 교육 권력의 서열에 끼어들기조차 어렵다. 게다가 최근에 와서는 특수교육계 내부에서도 농교육은 소수의 마이너리티 그룹으로 밀려나 그 위상이 더욱 초라하게 되어버렸다. 이제 농학교는 그 존립 자체에 위협을 받는가 하면, 농교육은 그 어느 때 보다도 자기 정체성 위기에 빠져 있다.
어찌할 건가? 동양철학의 열쇠 말 가운데 ‘원시반본’(源始返本)이라는 말이 있다. 원래 시작한 본래 자리로 되돌아가 그 근본에서 되비춰본다는 의미다. 그래서 노자 『도덕경(道德經)』에는 되돌아보는 것이 도의 움직임(反者道之動)이라 했다. 이와 비슷한 의미로 불교에서는 ‘반조’(返照)라는 말을 즐겨 쓴다. 어찌 보면 오늘의 한국 농교육은 본말(本末)이 심각하게 전도(顚倒)되어 있다. 이 본말전도(本末顚倒) 증상이 심하면 그 게 그런 줄도 모르고 도리어 당연한 것으로 정당화하는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 교육에서 지말(支末)을 근본으로 착각하는 경우는 별로 문제될 게 없지만, 거꾸로 근본을 지말로 착각하는 경우에는 어김없이 심각한 재앙(災殃)을 초래한다.
필자가 보기에 농교육에서 본말전도에 따른 재앙은 교육의 목적, 내용, 방법에 걸쳐 두루 퍼져 있다. 그 실상은 Why(목적), What(내용), How(방법)의 측면에서 각각 다루어져야 할 게다. 다만 여기서는 ‘Who’라는 주제가 제기하는 소위 주객전도(主客顚倒)의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농교육에서 주객전도의 문제는 특수교육 내에서도 좀 더 심각하고 민감한 문제를 제기한다. “우리를 빼놓고 우리에 대해 말하지 말라”(Nothing about us without us)는 장애인 당사자 중심성을 강조하는 소위 ‘장애학’(disability studies) 담론에서도 ‘농(인)학’(Deaf Studies)은 각별한 함의를 지닌다.
듣지 못함(deafness)은 과연 장애(disabilities)인가? 이것은 농교육이 소위 ‘Audism’ 중심인가, ‘Deafhood’에 기반 한 것인가에 따라 그 대답은 전혀 다르다. Audism 입장에서야 듣지 못함은 명백한 장애이지만, ‘Deaf studies’ 혹은 Deafhood의 입장에서 농은 결코 장애가 아니다. 이 문제는 언어지도방법과 관련하여 농교육에서 구화주의(oralism/audism)와 수화주의(manualism) 간의 해묵은 논쟁이 되어 왔다. 이 논쟁이 소모적인 것이 아니고 생산적인 것이 되려면 당사자에 의한 선택의 ‘주체성’(즉, 立處皆眞)이란 것을 그 중심에 놓고 원점에서 다시 봐야 한다. 최근 인공와우이식수술의 결정과정에서도 당사자의 인권과 주체적 결정권과 관련해서 복잡하고도 미묘한 윤리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농인세계에서는 청인 부모들이 일방적으로 농자녀의 CI를 결정하는 것에 대해 다수의 청인에 의한 소수 농인에 대한 ‘신식민주의’(neo-colonialism)로 비판하고 있다.
농인 당사자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언제나 열려 있어야 한다. 그 선택의 개방성 혹은 주체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다음 두 가지 원칙이 존중되어야 한다. 그 첫째는 당사자 중심의 원칙이다. 당사자의 행복권과 인권 자체가 무엇보다도 우선되는 기준에서 선택되어야 한다. 그 둘째는 선택의 개방성이 존중되어야 한다. 이거냐 저거냐 라는 배타적 선택으로서의 ‘냐냐주의’(either/or)보다는 이것도 저것도 개방적으로 수용하는 ‘도도주의’(borth/and)가 훨씬 온당하다. 그런 점에서 하나의 철학으로서 토털 커뮤니케이션 접근은 여전히 타당하다. 최근 종교다원주의(syncretism) 입장에 의하면, 종교문제에서 조차도 ‘냐냐주의’보다는 ‘도도주의’를 권고한다.
그런데 농교육의 현실은 당사자의 행복권과 인권이라고 하지만, 실상 그 열쇠를 누가 쥐고 있느냐는 데에 있다. 진정 우리의 농교육에서 농아동은 인권의 주체인가, 관리의 대상인가? 과연 당사자 중심인가, 대리자 중심인가? 심각하게 되물어 봐야 한다.
Where: 어디에 배치할 것인가?
농교육은 특수교육에서 가장 오랜 분리교육의 전통을 유지해 왔다. 지금도 농학교는 전형적인 분리교육체제이다. 서울농학교의 개교 100주년은 기본적으로 분리교육체제로서의 100주년이다(그동안 조기교육 단계에서 역통합의 성과를 일부 보이긴 했지만). 오늘날 정책 지향성으로서 통합교육은 ‘Full Inclusion’을 지향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은 많은 난관을 지니고 있다. 그 난관의 벽은 두껍고 높다. 장애학생이 일반학교에서 불편함 없이 공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기존의 모든 학교들이 질적으로 전면 재편(total/full restructualizing)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무한경쟁체제에서 장애학생들이 일반학생들과 더불어 불편함 없이 교육을 받을 수 있게끔 모든 학교가 품위 있게 개편된다는 것은 아득한 꿈이다. 그야말로 우리에게 그것은 ‘Edutopia’에 불과하다. 실제로 우리는 제7차 교육과정 개정과정에서 이 말을 겁도 없이 즐겨 사용한 적이 있다.
게다가 이명박 정권하에서 표준학력검사가 일제고사로 둔갑해서 치러짐에 따라, 개인 간에 그리고 지역 간에 점수 서열은 막강한 교육 권력으로 표상되고 말았다. 그 결과 우리는 계층과 지역 간에 학력 격차는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교육에서도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말았다. 이런 무한경쟁체제하에서 통합은 명분일 뿐이다. 그렇다고 분리교육에 안주하자니 농교육은 ‘소록도’교육이 되고 만다. 필자가 보기에 지금의 농학교 교육은 분리교육과 통합교육의 틈새에서 정체성 혼란에 빠져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통합교육은 하나의 ‘방편’(方便)이지 그 자체가 최선의 목적은 아니다. 우리는 통합교육이라는 명분으로 독수리를 까마귀로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농교육에서 분리냐 통합이냐는 교육 배치(placement)가 중요한 게 아니라, 농학생들이 어디(where)에서 양질(high quality)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그렇다면 지금의 농학교는 교육의 수월성 제고를 위해 어떤 노력을 얼마나 하고 있는가? 세력 판도를 놓고 볼 때, 특수교육계 안에서 농교육의 전성시대는 지났다. 우리나라에서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전체 특수학교 가운데 농학교가 가장 많은 분포를 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성기의 농학교 수(26개교)의 절반에 불과하면서도 그나마 대도시의 대표적 농학교를 제외하고는 학교로서의 존립 자체에 위협을 받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농학교들은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는 강점을 살려 낼 때다. 철저히 개별화된(individualized/personalized) 지도를 통한 명품(名品) 교육을 창출할 절호의 기회다. 문제는 그럴 의지와 구도를 가지고 끈질기게 노력하는가, 않는가이다.
원래 통합은 자연성이다. 인위적 전문성을 강조하다 보니 이런저런 명분으로 분화와 분리가 재생산되었다. 가장 좋은 것은 가정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지역사회에서 농아동이 자연스럽게 통합되어(included) 살아가는 공동체문화를 재현하는 일이다. 그리고 통합교육은 ‘사회통합’(social inclusion)이 대전제로 실현되지 않고는 그 뿌리를 내릴 수가 없다. 이를테면 다문화가정 자녀들이 일반 공교육 안에서 자연스럽게 통합될 때에, 장애아동의 통합가능성은 훨씬 수월해 진다. 그래서 통합교육은 사회통합의 반영이자, 사회통합을 향한 과정(process)의 문제이다. 이런 맥락에서 필자는 우리에게 분단극복으로서의 통일(unified)은 특수교육의 통합(inclusion)과 다르면서 같다고 했다.
What: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필자가 보기에 우리 농교육에서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는 가장 핵심적인 질문이다. 어째서 인가? 교육에서 내용(what)은 목적(why)과 방법(how)을 하나로 연관지우는 매개이자 실재(reality)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농교육에서는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내용으로서 교과교육)를 기반으로 하여 목적과 방법을 하나로 꿰는 일에 실패했거나 그 일을 등한히 했다. 누가 나더러 농교육의 실패이유를 묻는다면, “교과를 교과답게 가르치고 배우지 못한 데에 있다.”고 하겠다.
일찍이 Johnson(1989) 등은 ‘열린(잠기지 않은) 교육과정’(unlocked curriculum)이라는 유명한 논문에서 농교육의 실패이유를 두 가지로 적시한 바 있다. 즉, 그 하나는 언어수행능력(language competency)의 결핍이고, 다른 하나는 낮은 기대수준 때문이라고 했다. 여기서 그들이 언어수행능력을 ‘language performance’라 하지 않고 ‘language competency’ 라고 표현 한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 때 ‘언어수행능력’은 구어든 수어든 1차 언어 획득을 기반으로 한 2차 언어로서 문자언어 획득까지를 포괄하는 수행능력(competencies)이다. Johnson 등이 이 논문의 제목에서 교육과정(curriculum) 문제를 내걸고도 주로 농학생의 언어획득 문제에 집중한 것은 농교육의 문제를 언어교육 문제 쪽으로 부각시킨 탓이다.
필자는 원칙적으로 농교육에서 언어교육도 교육과정 혹은 정규 교과교육의 틀 속에서 정립되어야 한다고 본다. 여기서 교과내용은 언어양식(language mode)에 우선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규정하는 힘을 가져야 한다. 무슨 말인가? 농학생이 교과내용을 소화하는 데에 도움 되는 최적의 언어양식이 개방적으로 선택․활용되어야지, 특정의 언어양식이 교과내용을 규제하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언어는 의사소통 도구이지 그 자체가 목적과 내용을 규정하지는 못한다. 만약 농교육에서 특정 언어양식이 교육의 목적과 내용까지 규정하려 든다면 그것은 분명 교육의 재앙(災殃)이다. 이것은 농교육에서 또 하나의 심각한 본말전도(本末顚倒)이다.
앞에서 모든 교육은 심성함양에 연관되는 한에서 교육의 반열에 들 수 있다고 했다. 물론 농교육도 그 예외가 될 수는 없다. 그러면 ‘교과공부=마음공부’의 내적 연관을 어떻게 정립할 수 있는가? 유학을 성(性)과 이(理)의 학문으로 정립한 주자(朱子)는 우리가 지식을 내면화(즉, 格物致知)한 최종단계로 ‘활연관통’(豁然貫通)이라는 말을 썼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이 진선미(眞善美)의 이상적 기준과 일치했을 때의 상태를 인식론적 관점에서 표현한 말이다.
『중용』에서는 앎(교과)이 삶(마음)으로 연관되는 과정적 단계를 다음의 5단계로 제시하고 있다. 즉, 널리 배우기(博學)-자세히 묻기(審問)-깊이 생각하기(愼思)-분명하게 표현하기(明辯)-돈독히 행하기(篤行)로 이어진다. 여기 5단계의 한문 끝 자는 학문(學問)-사변(思辨)-행(行)으로 이어져, 앎이 삶이되는 과정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교과공부가 어떻게 마음공부로 합일(合一)되는가를 우리에게 명백히 시사해 준다.
How: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농교육의 역사는 언어지도 방법논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논쟁은 학문 발전의 핵심이다.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시대를 거쳐 중국은 문명국으로 우뚝 설 수 있었고, 소크라테스의 논쟁제기를 거쳐 헬레니즘문화가 뿌리를 내리게 되었고, 이기(理氣)논쟁을 통해 조선의 성리학이 중국을 능가하는 데에 이르기도 했다. 그런데 논쟁이 역사발전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생산적이어야지 소모적이어서는 안 된다. 농교육역사에서 언어지도 방법논쟁이 어느 정도로 생산적인 논쟁이었는지 쉽게 결론이 얻어지지 않는다. 그만큼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쟁점 자체가 기실은 그리 복잡하지 않은 것임에도 쉽게 합의된 결론이 도출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왜 그런가? 그 쟁점에 매몰되어 꺼둘리는 동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논쟁을 위한 논쟁에 휘말려 들었는지도 모른다. 전술한 것처럼 이것은 농교육에서 또 하나의 심각한 본말전도(本末顚倒)다. 여기서 우리는 “누구를 위한 논쟁인가?”를 되물어 봐야 한다. 논점의 주체가 농인당사자인가 부모 혹은 전문가들인가 하는 질문을 원점에서 다시 제기해 봐야 한다. 물론 부모나 전문가들은 당연히 그들(농인)을 위해서(for)라지만, 그들의(of) 입장이라는 것과 제3자의 그들을 위해서라는 것과는 이치상(즉, 개념적으로)으로나 윤리적으로나 하늘과 땅의 차이다.
농교육의 원조(元祖)인 C. M. de l'Epee는 1760년 파리농학교에서 농교육을 시작하면서 “수어는 농인의 모국어(first/natural language)”라는 입장을 천명했다.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선구자(先驅者; pioneer)는 위대하고 탁월하다. 필자가 보기에 레페의 이 원칙은 농교육을 관통하는 제1원칙이다. 그러나 이 제1원칙은 소위 정상화(normalization)를 표방하는 구화주의자(oralist)들의 힘에 밀려 끊임없이 상처받는 마이너리티로 몰려나야 했다. 작년 런던 장애인 올림픽 개막식에서 호킹 박사는 우리에게 어떤 경우에나 정해진 ‘표준’(standard)은 따로 없다고 했다. 그 표준은 각자의 내면에 존재할 수는 있을지언정, 모두를 규격화하는 표준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19세기 말 이태리 미라노(Milan)에서 개최된 세계농교육자대회(1880)는 표결 결과 구화주의의 일방적 승리로 소위 ‘구화일변도주의’(only oralism)를 표방하기에 이르렀다. 필자가 보기에 이것은 ‘정상화’의 명분이 농교육의 실리(實利/實理)를 제압한 결과이다. 그 여파로 “수화는 구화의 적”이라는 슬로건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게다가 20세기에 접어들며 전자공학의 발달에 힘입어 보청기가 급속히 개발․보급됨에 따라 구화주의는 날개를 단 기세로 세계농교육을 주도했다. 그러던 중 1950년대 말 구소련을 중심으로 수정구화주의(neo-oralism)가 제기되면서 ‘구화일변도주의’에 대한 일련의 반성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구화주의의 표방이래, 농학생들의 학력이 그 이전에 비해 계속 떨어지는 기이한 현상을 보게 되자, 농교육계 내부에서 자성(自省)의 목소리가 점차로 고개를 들게 되었다.
이 자성의 연장선상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1970년대 후반에 소위 토털 커뮤니케이션(total communication)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 TC 접근은 농인 당사자의 독특한 니즈(needs)를 존중하는 철학의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농교육 실천에서 반쪽의 성공과 실패를 함께 안겨 주었다. 이 접근은 모든 언어양식을 개방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내세웠지만, TC에서 적용된 수어는 음성언어의 문법 틀에 수어를 적용한 것이어서 독자적 언어로서 수어의 생명력을 상실했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영어가 콩그리쉬(Konglish)로 변질된 격이다. 말하자면 가짜수어(spoken manual language)가 진짜수어(natural sign language) 행세를 하자니 이도 저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현장에서는 하나의 변종(變種)으로 동시법(simultaneous method)을 적용하면서, 그게 곧 TC 접근인 줄로 착각하고 있었던 게다. 그래서 TC 접근은 빛을 발해보지도 못한 채로 실천과정에서 퇴색되고 말았다.
이에 대한 또 하나의 반성으로 등장한 것이 1990년대의 소위 2Bi(bicultural/bilingual) 접근이다. 이것은 농인들이 향유하는 농문화(Deaf culture)를 하나의 독립된 문화로 인정해서 그 문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통용되고 있는 수어(natural sign language)를 농아동의 1차언어로 획득되게 하자는 것이다. 꿩 잡는 게 매다. 농아동에게 1차언어로서 자연수어가 우선 안정되게 획득되어야, 2차언어로서 문자언어(즉, 읽고 쓰는 능력)가 제대로 획득될 수 있는 게다. 반대로 1차언어로 음성언어가 불안정하게 획득되면, 2차언어로서 문자언어는 더욱 그 획득이 불투명하기 마련이다. 목수에게 연장이 중요하듯, 도구로서 언어가 내축(內築)되어 있는 만큼 농아동에게 교과교육이 원활히 수행되고, 안정된 학력신장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고양이 목에 누가 방울을 달 건가? 어찌 보면 수어는 구어에 비해 그 지지세력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농자녀를 둔 부모의 95% 이상은 청인 부모다. 그들 청인 부모가 이 2Bi 접근을 얼마나 거부감 없이 수용하느냐가 문제다. 청인부모가 자신의 농자녀를 위해 농문화에 친밀감을 가지고 처음부터 적극 수용한다는 게 결코 쉬운 용단이 아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Metanoia와 같은 의식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농을 보는 관점에서 메타노이아 없이는 2Bi 접근은 수용이 불가능하다.
게다가 인공와우이식수술이 하나의 복음(福音)처럼 부모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의사는 일차적으로 수술 자체의 성공여부에 책임이 있지, 언어재활은 결국 당사자와 부모의 노력에 위임된다. 수술은 물리적 처치(게다가 남아 있는 잔존청력마저도 함께 잘라버리는 것)이자 최후의 조처이기 때문에 당사자에게는 자신의 정체성에 평생을 두고 영향을 미치는 심각한 문제다. 이 자아정체성 문제는 어디까지나 당사자 자신이 평생을 두고 감당해야 할 몫이다. 그럼에도 인공와우이식수술의 결정과정에서 ‘당사자 중심성’이라는 게 소위 역지사지(易地思之)로 얼마나 존중되는지 아직은 예민한 윤리적 숙제로 남아 있다. 농아동에게 언어양식(language/communication mode)의 선택은 전적으로 그들에 의해, 그들을 위해, 그들의 것으로 열려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행복하다.
When: 배움은 언제까지인가?
배움은 죽을 때까지 이어진다. 자원은 한계가 있지만 배움에는 그 끝이 없다. 공자가 70이 넘어 제자들이 이제 좀 쉬시는 게 좋겠다고 말하니 공자 왈 “하늘이 쉬더냐?”고 되물었다. 그래서 『중용』에서 ‘지성무식’(至誠無息)이라 했다. 공자는 죽을 때까지 배우는 일을 스스로 즐긴 사람이다. 그의 삶은 ‘호학역행’(好學力行)의 삶 그 자체였다. 그는 약 2600년 전에 ‘평생학습자’로서의 귀범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이 시대는 지식정보의 홍수시대다. 따라서 끊임없이 학습하지 않으면 누구나 삶의 질 관리가 어렵게 되어 있다. 옛날에는 소수의 혜택 받은 계층으로서 지식인이 우대되기까지 했지만, 이 시대는 모두가 나름의 지식인 반열에 들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가 없게끔 되어 있다. 그래서 언필칭 ‘지식기반'(knowledge-based) 사회이다.
빈곤문제-장애(disabilities)-교육 불평등의 문제는 구조적으로 강고한 내적 연결고리를 형성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무한경쟁 체제에서는 이 연결고리가 신의 힘으로도 떼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강고해져 버렸다. 가난하기 때문에 장애인이 되기 쉽고, 장애인이기 때문에 제대로 배우지 못해 더욱 가난해지는 악순환의 재생산 고리로 이어진다. 한 조사(보건복지부, 2008)에 의하면, 18세 이상 장애인 가운데 초등학교 졸업학력 이하의 장애인 비율이 무려 전체의 절반(48.9%)에 이르고 있다. 게다가 무학을 포함해서 중학교 이하의 학력 소지자가 전체 장애인의 65.4%로 약 3분의 2정도에 이르고 있다. 이는 고등학교 졸업생 80% 이상이 대학에 진학하는 고학력 사회의 기준에 비하면 엄청난 학력 격차다. 이게 장애인에 대한 교육격차의 드러난 현실이다.
학교교육의 불평등이 이러하다면, 학교교육 이후의 평생교육기회 불평등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우리나라에서 장애인 평생교육이 처음으로 법제화된 것은 ‘장애인 등에 대한 특수교육법’(2007) 제32조에서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초․중등교육을 받지 못하고, 학령기가 지난 장애인을 위하여 학교형태의 장애인평생교육시설을 설치․운영할 수 있게 하고, 이에 필요한 경비를 예산의 범위 안에서 지원하도록 한 것이다. 이 규정에 의거하여 지난 정부시절에 ‘장애성인 평생교육 활성화 방안’(2010.09.14)을 하나의 안으로 제시한 적이 있다. 이 안에서는 기존의 장애인야학 중심으로 장애성인에 대한 문자해득 능력을 길러주는 데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장애인들이 실제로 이용하고 싶어 하는 평생교육 프로그램은 자립생활(21.8%), 정보교육(17.7%), 직업교육(16.9%), 여가교육(16.8%). 교양교육(12.8%), 문해교육(12.3%)의 순으로 나타나고 있어(곽승철 외, 2010), 장애인당사자의 평생교육 요구와 정부의 시책 간에는 상당한 괴리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장애인에 대한 평생교육을 정부에서는 검정고시 준비과정으로 인식하는 반면에, 장애인 당사자들의 입장에서는 자립생활에 필요한 지식과 기능을 광범위하게 요구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농인들도 평생학습인으로서 자신의 삶의 품격을 스스로 높여 갈 수 있는 ‘학습 자활감’(learning empowerment)을 어떻게 체현(體現)할 수 있는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다.
모든 농인들은 평생학습인으로 학습할 능력을 본래부터 구유하고 있다. 문제는 스스로 퇴굴(退屈)하거나 아예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데에 문제가 있다. 우리는 농인들에게 무엇인가 말해주고 싶어 할 만큼 충분히 다르지만, 서로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비슷하다. 그게 사람 사는 모듬이자 우리네 삶이다. 이 시대에 농인의 평생학습권은 곧 그들의 생존권이다.
한국 농교육의 과제
(1) 학습자 중심 교육
교육에서 ‘학습자 중심’(learner-based/centered)이라는 말은 진부할 정도로 회자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는 ‘학습자 중심’이라는 말을 그동안 남용 혹은 오용해 오면서 그 진정한 함의를 간과해 버린지도 모른다. 이 말은 흔히 ‘흥미 중심’이라는 경험중심 교육사조의 외피적 지향성에 잘못 감염되어, 뭐든 학습자가 하자는 대로 따라가는 교육으로 너무 안일하게 수용되거나 해석된 적은 없는지 되짚어 봐야 한다. 교육에서 ‘학습자 중심’은 학생들의 흥미보다는 진정 학생을 위한 중심 가치와 기준이 무엇인가를 우선해서 학습자의 경험을 구성하고자 한다. 교육적 경험은 반드시 흥미본위일 수 없다.
‘흥미’가 교육적이기 위해서는 ‘중화’(中和)를 유지해야 한다. 『중용』첫 장에서는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을 커다랗게 내걸고, 군자의 도(道)로서 ‘신독’(愼獨)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중화’(中和)를 말한다.
희노애락(喜怒哀樂)이 아직 발현되지 않는 상태를 중(中)이라 일컫고, 그것이 발현되어 절도에 들어맞는 것을 화(和 )라고 일컫는다. 중(中)이라는 것은 천하의 큰 근본(大本)이요, 화(和)라는 것은 천하 사람들이 달성해야만 할 길((達道)이다. 중(中)과 화(和)를 지극한 경지에까지 밀고 나가면, 천(天)과 지(地)가 바르게 자리를 잡을 수 있고, 그 사이에 있는 만물(萬物)이 잘 자라나게 된다.
‘중화’(中和)의 中은 희로애락이 발현되기 이전의 ‘미발’(未發)의 기준이다. 그리고 和는 희노애락의 감정이 발현되어 그것이 절도(節度)에 들어맞는 상태이다. 여기 ‘중’(中)은 모든 감정(혹은 흥미)이 동적인 평형을 이루고 있는 원초적(본래적) 상태이지만, 감정의 발현은 상황성을 갖는다. 그 상황성을 위에서는 ‘절’(節), 즉, ‘삶의 마디’로 보았다. 인간의 품위 혹은 격조는 그 삶의 마디마디(時中)에서 가장 적절한 감정표현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화(中和)를 지극히 할 때에 비로소 하늘과 땅이 바르게 자리를 잡으며, 그 속의 만물이 잘 자라게 된다는 것이다. 즉, 천지인(天地人)이 삼위일체(三位一體)의 경지에 드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여기에서 ‘화’(和)의 절도가 곧 교육적 흥미의 절도이다.
농교육에서 ‘학습자 중심’교육의 위기는 ‘학습자 중심’을 가장한 부모중심, 교사를 비롯한 전문가중심, 나아가 점수중심 교육이 갖는 폐해다. 장애인운동에서 소위 당사자배재불가원칙(Nothing about us without us)은 대리자중심에 대한 당사자중심의 저항이다. 1980년대 말 Gallaudet University에서 농학생들이 “이제는 농인총장이다”(Now Deaf President)는 주장을 관철시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은 그 대표적인 저항의 성과다. 이 일이 있은 다음 미국에서는 농인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물론, 장애인들을 보는 관점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초래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권리를 향한 저항만으로는 세상을 바꾸는 데에 한계가 있다.
필자는 이제 농교육에서 ‘학습자 중심’교육은 좀 더 품격 높은 ‘인간화교육’(humanized instruction)으로 재현되기를 고대한다. 이것은 지금까지 하나의 기법 내지는 운영도구로 개별화교육(IEP)을 개발․운영해온 것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역지사지(易地思之)로 교사-학생 간에 코드가 통해야 상호침투(two way communication)로서의 교수-학습이 존재한다. 불교에서 사섭(四攝)의 하나로 ‘동사’(同事)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학습자 중심’을 깍아지른 듯이 반영하고 있다. 여기 ‘동사’(同事)는 교사가 학습자와 같은 일에 임하기 위해, 학생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방법으로 교육(수업)에 임하는 것을 의미한다. 선(禪)교육에서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이 있다. 병아리가 알에서 깨쳐 나오고자 할 때, 어미 닭이 동시에 병아리의 파각(破却)을 도와주어야 부화(孵化)가 된다. 이 때 ‘동시’(同時)는 병아리의 사활이 걸린 문제다. 이것이 ‘학습자 중심’의 극치다.
(2) 심성함양으로서 교과교육의 정립
학교교육에서 교과가 ‘심성함양’에 어떤 연관이 있는가? 과연 연관이 있기나 한가? ‘점수=교과’로 인식되는 상황에서 영악스런 점수관리와 심성문제는 오히려 역(逆)상관인 게 우리의 현실이다. 이홍우(李洪雨) 교수는 “교과의 의미라는 주제는 사람들이 모르면서도 그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기 쉬운 그런 주제”라고 했다. 우리는 교과의 본래 의미를 문제 삼기 이전에 교과는 요령껏 외워서 점수 따기의 통로로 수용될 뿐이다. 그 점수는 어김없이 출세의 지표로 연결된다. 교과는 인류가 축적해 온 ‘진선미’(眞善美)의 반영이자 그 세계 자체이다. 앞에서 필자는 교과에 담긴 진선미의 세계와 내면적으로 소통되는 인식론적 상태로 ‘활연관통’(豁然貫通)을 말했다. 이 활연관통은 교과공부가 곧 마음공부로 이어지는 이상적 상태를 지칭한다.
과연 우리 농학생들에게도 교과를 매개로 한 이 ‘활연관통’, 즉, 교과=마음이 가능한가? 아마 대부분 교사들은 묵시적으로 그 가능성을 믿지 않을 테고, 또 부모들은 농자녀와 그들 교사를 하나로 묶어 불가능을 깔고 있을 터이다. 우리가 교육에서 원칙적으로 가능함에도, 실제로 불가능한 쪽으로 믿고 있는 데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전술한 것처럼『중용』에 의하면, 교육은 하늘의 지엄한 명령으로 모든 사람에게 품부된 본래성(本來性; human nature)을 함양․회복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불학(佛學)에서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은 모든 중생이 여래(如來)의 세계에 들 수 있다는 큰 믿음을 일으키는(起信) 논술이다. 문제는 농아동은 안 된다는 잘못된 믿음이다. 기신론은 인간교육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불퇴전의 믿음을 깔고 있다. 그래서 기신론의 특수교육학적 함의는 감동적이다. 『중용』에서도 인간교육의 가능성과 더불어 그 필요성을 거듭 강조한다.
배우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배울진대 능하지 못하면 도중에 포기하지 마십시오. 묻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물을진대 알지 못하면 도중에 포기하지 마십시오. 생각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생각할진대 결말을 얻지 못하면 도중에 포기하지 마십시오. 분변(分辨)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분변할진대 분명하지 못하면 도중에 포기하지 마십시오. 행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행할진대 독실하지 못하거든 도중에 포기하지 마십시오. 남이 한 번에 능하거든 나는 백번을 하며, 남이 열 번에 능하거든 나는 천 번을 하십시오. 과연 이 호학역행(好學力行)의 도(道)에 능하게만 되면, 비록 어리석은 자라도 반드시 현명해지며, 비록 유약한 자라도 반드시 강건하게 될 것입니다(김용옥, 중용 인간의 맛. 통나무, 2011, pp.255-257).
필자가 보기에 『중용』의 이 말은 바로 특수교육을 향한 경구(警句)이다. “남이 한 번에 능하거든 나는 백번을 하며(人一能之己百之), 남이 열 번에 능하거든 나는 천 번을 한다(人十能之己千之)”는 말은 우리 특수교육인이 장애아동과 함께 ‘호학역행’(好學力行)하는 자세 혹은 태도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런 수준으로 교과교육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교사에 의한 ‘교과의 내면화’가 전제되어야 한다. 위에서 ‘호학역행’(好學力行)하는 삶의 자세는 전형적으로 교사의 삶을 지칭한다. 교사에 의한 그런 삶을 통해서만이 학생들을 그런 수준(교과=마음)으로 안내할 수 있다. 『논어(論語)』첫 구절에서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에서 배우고 익힘이라는 것은 교과를 배워 익히는 것뿐만 아니라, 교사의 인품도 모방해서 익힌다는 의미가 내재해 있다. 그래서 교직은 지난(至難)하다.
(3) 농학(Deaf studies)에서 본 한국 농교육의 과제
88올림픽 무렵 서울농학교는 ‘서울선희학교’로 교명을 바꾸어 무려 14년간이나 이 교명을 사용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농’(deafness)을 불명예스런 장애의 명칭으로 인식하여 의도적으로 교명에 ‘농’(聾)이란 말을 지우고자 한 것이다. 같은 감각장애이지만 서울맹학교는 당시 교육부의 지시에 굴하지 않고 교명을 그대로 유지해 왔다. 마침 서울농학교 동창들의 강력한 권유를 받아들여 선희학교에서 농학교로 다시 교명을 회복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이것은 당대 사회가 ‘장애’로서 ‘농’의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드러낸 일종의 해프닝이자 증거이다.
‘장애’(disabilities)는 내밀한 개인의 실존적 문제로 당사자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긴 하지만, 그 장애는 결코 개인의 병리적 문제가 아니라 근원적으로는 당대 사회가 가공(加工)한 사회적 병리문제다. 장애에 대한 이런 인식의 전환과 더불어 장애인당사자들의 자기권리 주장 혹은 당사자배재불가의 원칙으로 담론화된 것이 소위 ‘장애학’(disability studies)이고, 이것이 농인세계에서는 ‘농(인)학’(Deaf studies)으로 등장하였다. 필자는 수년전에 한국특수교육학회가 마련한 학술대회에서 장애학의 관점에서 제기되는 특수교육담론과 기존의 특수교육학계에서 고수해온 주류담론 간에는 서로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 형편은 지금도 별로 달라진 게 없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서로에게 불행한 일이다. 나는 장애학의 입장에서 본 특수교육의 재편(restructuring)이 향후 한국 특수교육의 중요과제가 된다고 본다. 마찬가지로 우리 농교육계에서도 ‘농학’의 입장에서 본 한국 농교육의 개선과제를 진지하게 논의해야 할 때다.
작년에 장진석(2012) 교수는 『오디즘과 인간으로서의 농인』(Audism & Deafhood, 2011)이라는 주목할 만한 책을 번역해서 내놓았다. 이 책에서 장 교수는 오디즘(Audism)을 그대로 음역해서 옮겼는데, 그것의 함의는 청인중심주의, 청인우선주의, 청능우월주의, 청각주의, 음성언어주의, 농인차별주의 등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에 비해 ‘Deafhood’라는 말은 농인을 한 인간으로 보고자 하는 사회학적 의미가 다분히 강조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인간으로서의 농인’으로 풀어 옮겼다. 나는 ‘Deafhood'를 ’농(인)다움‘ 혹은 ‘농(인)공동체’ 정도로 이해하는 데, 막상 번역어로서는 마뜩치 않은 감이 없지 않다.
‘오디즘’의 입장에서 농인은 언제나 채무자의 처지로 몰리고, 청인은 은근히 채권자로서의 위세를 드러낸다. 이 책에서는 미라노 세계농교육자대회가 개최된 1880년을 기점으로 그 이전을 ‘식민직주의 이전’으로 명명하고, 그로부터 20세기 중반까지를 다수의 청인세계에 의한 소수의 농인세계에 대한 ‘식민주의 시대’로 분류하고 있다. 21세기는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 전반에 걸쳐 언필칭 ‘탈식민주의’시대다. 필자는 이 글에서 ‘청각장애’라는 말 대신에 ‘농’이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더욱이나 이 자리는 서울농학교의 100주년을 회고하고 기념하는 자리가 아닌가.
듣지 못함(deafness)은 결코 장애가 아니다. 농인들은 시각언어로서 수어(sign language)라는 독립(독자적) 언어를 사용하는 언어소수자일 따름이다. 게다가 수어는 언어적 자질을 완벽하게 구비한 또 하나의 독립된 언어양식일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언어에 비해 뛰어난 예술성까지 갖추고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용어)가 사람에 관계되는 것일 때, 그 말을 어떤 인식의 전제 혹은 틀 속에서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용어는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를테면 ‘성’(性)이라는 말은 영어로 남녀를 구분하는 Gender를 의미하기도 하고, 남녀 간의 육체적 교접관계를 총칭하는 Sex이기도 하고, 『중용』첫 구절의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에서 ‘性’은 하늘의 지엄한 명령으로 모든 인간에게 품부된 Human nature와 같은 의미이다.
이처럼 우리가 ‘성’(性)이라는 말을 어떤 의도로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말에 담긴 의미의 긍정성과 부정성은 극을 치닫는다. 젠더로서의 성(性)은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여성운동가들에게는 사회학적 함의가 강하고, 섹스로서의 성(性)은 동물적 본성으로서의 수성(獸性)을 함의하고 있는 반면, 인간 본래성(本來性)으로서의 성(性)은 하늘이 인간에게 품부한 이상적 인성(人性)으로 그 함의를 담고 있다.
여기 ‘농학’(Deaf studies)에서 D를 대문자로 표기하는 것은 Korean 혹은 American에서 대문자 표기를 하듯, 하나의 인종집단(ethnic group)으로서 농의 정체성을 존중하기 위함이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서울농학교’는 농인들의 자기정체성을 고양하는 의미에서 ‘농’이라는 말을 자랑스럽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농에 대한 그런 메타노이아를 깔고 기존의 농교육은 패러다임적 이행(移行)을 해야 한다. 필자가 보기에 100주년에 즈음한 서울농학교와 한국 농교육의 근원적인 과제는 바로 여기에 달려 있다.
<참고문헌은 본문 하단의 각주(脚註)로 대신함.>
* 이 글은 서울농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세미나(2013.10.24)에서 기조발표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