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2):『노자』
노자(老子)는 기원전 580년에서 500년 사이에 생존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노자가 남긴 유일한 글인 『도덕경(道德經)』은 한문으로 5천자 남짓하여 2백자 원고 25매 정도다. 이 책은 간결한 운문체로 그 체제는 상(道經)․하(德經)편 모두 81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 ‘도’(道)는 우주의 궁극실재 혹은 근본원리와 같은 것이라면, ‘덕’(德)은 그 도(道)가 구현될 때 인간에게 얻어지는 ‘힘’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도(道)는 마음공부의 체(體)요, 덕(德)은 그 용(用)에 해당된다.
임어당(林語堂)은 “동양문헌 가운데 어느 책보다도 먼저 읽어야 할 책이 바로 노자의 『도덕경』”이라 했다. 실제로 서양인들에게 가장 많이 읽혀지고 있는 동양고전으로 노자 『도덕경』이 꼽힌다. 도올 김용옥은 “『노자』는 공부하는 책이 아니라, 그냥 부담 없이 정직하게 느끼는 책이어야 하는 것”이라 했다. 그러나 그냥 정직하게 느껴지기 위해서는 상당한 정도로 마음공부가 축적되어 있어야 한다. 솔직히 필자의 경우 처음 『노자』를 읽고, 사람 힘 빼는 경(經)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게 마음 비우라는 조짐인가.
노자사상은 중국사상사에서 기축을 형성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 이래로 유․불․도(儒․佛․道) 삼교(三敎)가 하나의 현묘한 도를 형성한 전통을 뚜렷이 지니고 있다. 유가(儒家)와 도가(道家)는 상호비판을 주고받는 가운데 동양사상을 풍부하게 발전시키는 두 축이 되었다. 또 인도에서 유입된 불교는 노장사상의 바탕 위에서 동아시아 불교의 정착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런 불교의 옻을 입고 12〜13 세기에 신유학으로 성리학(性理學)이 대두하였다. 이런 일련의 역사전개 과정에서 노장사상은 우리 몸속의 핏줄처럼 이런저런 모습으로 녹아들었다.
1.
『중용』에서처럼 『노자』1장 첫 구절은 상편인 『도경(道經)』전체를 함축적으로 아우르고 있다. 즉, 『중용』은 천명(天命)을 커다랗게 내걸었다면, 『노자』는 도(道)가 실현되는 이상세상을 내걸었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즉, 도(道)를 도라고 말하면 늘 그러한 도가 아니요, 이름을 이름지우면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 노자가 말하는 도(道)는 이름 지어 규정할 수 없는 형이상(形而上)의 길이다. 석가는 49년 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말로 중생을 가르치고도, 마지막엔 “한 마디도 법도 설하지 않았다”고 잡아뗀다. 왜 그런가? 여태까지 그가 설한 말에 붙잡히지 말라는 것일 터. 노자의 ‘도’(道)는 언어를 넘어서 있다. 달은 손가락이 아니고, 영토는 지도가 아니다. 해서 손가락에 꺼들리면 달을 못보고, 언어에 꺼들리면 실재(reality)를 놓친다.
붓다는 49년이나 설법을 행하고도 끝내는 그것을 지우고자 했지만, 노자는 책의 첫 머리에서 ‘도’(道)는 문자의 언표를 넘어서 있는 것이라 했다. 언어철학자인 비트겐슈타인도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할지어다.”고 했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는 참으로 그러한 ‘진여’(眞如)에 대해 “진여(眞如)라는 말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謂言說之極)이며, ‘말로써 말을 없애려는 것’(因言遺言)과 같은 것”이라 했다. 그래서 노자는 ‘도’(道)라는 것을 도(道)라고 말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道)가 아니다(非常道)고 했다. 여기에 ‘상도’(常道)를 흔히 ‘영원한 도(道)’로 잘못 해석하는 것을 도올은 경계한다.
여기 ‘늘 그러한’(常)이라는 말을 많은 『노자』의 번역자들이 ‘영원불변의’라는 말로 잘 못 해석한다. 첫 장부터 이렇게 『老子』를 잘 못 해석하면 노자의 지혜는 마치 영원불변의 이데아적인 그 무엇을 추구하는 서양철학이나, 천국의 도래를 갈망하는 기독교의 초월주의가 되기 쉽다. ...(중략) 노자는 ‘항상 그러함’만을 말하지 ‘불변’(changelessness)을 말하지 않는다. 동양인들에게 ‘영원’(permanence)이란 ‘변화의 지속’일 뿐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다만 변하지 않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생각이다. 그 생각을 노자는 여기 ‘말’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도를 도라고 말한다”는 것은 곧 시시각각 변하지 않을 수 없는 도를 변하지 않는 우리의 생각 속에 집어넣는다는 뜻이다. 그렇게 생각 속에 집어넣어져 버린 도(可道之道)는 항상 그러한 실체의 도일 수 없다는 것이다. 서양인들이 불변의 영원을 추구했다면, 동양의 지혜는 변화의 영원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김용옥, 2000, pp.105-106).
도올은 ‘변화의 영원성’ 추구를 동양적 지혜의 특성으로 내 세웠다. 김충열 교수도 여기 ‘상도’(常道)를 ‘순환 속의 영원’으로 해석했다. 변화의 철학인 『주역』에서 말하는 변역(變易)과 불역(不易)에서 보듯이, 그것이 영원히 ‘도’(道)로 있기 위해서는 항상 멈추지 않고 변해야 하는 것이다. 오강남(2010)은 여기 ‘도’(道)란 직관과 체험의 영역이지 사변과 분석의 정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했다. 해서 말할 수 있는 도(道)와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名)은 구체적인 일이나 형체를 가리키니, 그것은 항상 됨이 아니라는 게다. 그러므로 ‘도’(道)는 말할 수 없고 이름 지을 수 없는 것이다. 노자는 인간과 사회문제의 원칙을 요순(堯舜)의 전통이 아니라 자연(自然)에서 구하고자 했다. 최진석(2001)은 노자에게 전통은 가도(可道)이자 가명(可名)이며 인도(人道)라면, 자연은 상도(常道)이자 상명(常名)이며 천도(天道)라 했다.
필자가 보기에는 여기 노자가 말하는 ‘상도’(常道)는 『중용』에서 말하는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의 도(道), 혹은 도(道)라는 것은 잠시라도 나를 떠날 수 없는 것이라고 규정한 그 도(道; way)보다 형이상학적이고 근원적인 것이다. 김충열(2004) 교수는 노자의 도(道) 개념이 나옴으로써, 증국철학사에서 종래의 상제(上帝)니 귀신(鬼神)이니 하는 무서운 개념들이 존재 발판을 잃거나 권위를 상실하는 등 많은 변화를 가져 왔다고 했다.
이어 노자는 “이름이 없는 것을 천지의 처음이라 하고, 이름이 있는 것을 만물의 어미라”(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 했다. 여기 ‘무명’(無名)은 도(道)의 체(體)이고, ‘유명’(有名)은 도(道)의 용(用)이다. 노자에 의하면, 무릇 ‘유’(有)는 모두 ‘무’(無)에서 시작되므로, 아직 드러나지 않고 이름이 없는 때가 만물의 시작이 된다. 이처럼 도(道)가 무형(無形)․무명(無名)으로 만물을 시작케 하고 이루어주면, 만물은 그에 의해 이루어지되 그 까닭을 알지 못하니 현묘하고 또 현묘(玄之又玄)하다는 것이다. ‘도’(道)를 뭐라 설명하기가 어려워 현묘하고도 현묘하다고 표현한 것이다. 김충열 교수는 여기 ‘현’(玄)이란 모든 색깔을 하나로 합쳤을 때의 색깔이라 했다. 도(道)의 빛깔이 왜 ‘현’(玄)인가? ‘현’(玄)은 모든 것을 하나로 모았을 때 나타나는 빛깔이다. 실재하는 세상은 전부가 모여 있는 총상(總相)이다. 이 ‘현’(玄)이 바로 도(道)를 형용하는 ‘무’(無) 혹은 묘(妙)로 쓰인 것이다.
『노자』2장에서 “유와 무는 서로 살게 해 준다”는 ‘유무상생’(有無相生)을 말한다. 없음(無)과 있음(有)이 서로 상대편의 근거가 되면서 상생(常生)한다. 노자는 이 세계를 반대되는 것들이 꼬여서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이 세계는 대립되는 쌍들(즉, 有無, 高低, 長短, 上下, 前後)이 서로 꼬여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주의 존재원칙(恒/常)이자 도(道)이다. 그래서 노자는 “반대편으로 나아가려는 것이 도(道)의 움직임/운동력”(反者 道之動)이라 했다. 그리고 이 운동력은 ‘자연’(自然)이 본래적으로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도(道)를 체득한 성인(聖人)의 마음 경지를 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성인은 함이 없음의 일에 처하고 말없이 가르침을 행한다. 만물은 스스로 자라나는데 성인은 내가 그를 자라게 한다고 간섭함이 없고, 잘 되어가도록 하면서도 그것에 기대지 않는다. 공이 이루어져도 그 공속에 살지 않는다. 대저 오로지 그 속에 살지 아니하니 영원히 살리라.”(『노자』2장, 김용옥, 2000.) 여기 ‘성인’(聖人)이라는 말은 『노자』전체에서 자주(약 30번) 등장하는 말이다.
『노자』는 본시 성인(聖人)의 길을 밝힌 책이라는 설도 있다. 어원적으로 성인(聖人)은 귀가 밝은 사람이다. 귀가 밝아 보통 사람이 쉬이 감지하지 못하는 것도 잘 감지할 수 있다는 뜻이 들어 있다. 여기 성인(聖人)은 물 흐르듯이 함이 없는 일(無爲之事)에 처하고 말없이 가르침(不言之敎)을 행하는 사람이다. 여기 ‘불언지교’(不言之敎)는 ‘언지교’(言之敎)와 대비되는 노자의 교육관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노자에 의하면, 성인은 일을 하되 일한 결과를 소유하지 않는다(生而不有). 나아가 자신이 이룬 공(功)에 머물지 않음으로써, 그는 영원히 살 수 있다. 원래 자연(自然)은 그 공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래서 대자유(大自由)다.
『노자』(제4장)에 “도는 텅 비어(道沖)” 있어서 아무리 퍼내어 써도 고갈되지 않는다고 했다. 노자에게 ‘빔’(虛)은 존재의 가능태이자 도(道)의 모습이다. 그에게 마음공부는 채움(有爲)이 아니라, 비움(無爲)이다. ‘허’(虛)의 여유를 지니는 만큼 존재는 자유롭다. 노자철학에서 ‘빔’(虛)을 유지하는 게 자연(自然)이고 도(道)이다. 그래서 무위(無爲)․무욕(無慾․무명(無名)이 곧 도(道)의 모습이다. 그래서 노자철학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이어 도(道)는 ‘계곡의 신’(谷神)과 같아 결코 죽지 않으니 이른바 ‘신비의 여인’(玄牝)이란다. ‘곡신’(谷神)은 골짜기 가운데의 빈 곳이다. 여기 ‘계곡의 신’(谷神)은 도(道)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리고 신비의 여인인 ‘현빈’(玄牝)은 천지의 근본이란다. 여기서 노자의 ‘도’(道)는 ‘여인’으로 상징된다. 『노자』에는 ‘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갓난아기, 통나무(樸), 물과 계곡, 그리고 여인이 등장한다. 여기 ‘도’(道)는 어머니와 같다. 도올은『노자』 전체를 통하여 가장 시적인 장을 뽑으라면 ‘곡신불사’(谷神不死) 장(6장)을 택하겠다고 했다.
『노자』에는 도(道)의 성질을 ‘천장지구’(天長地久)로 표현했다. “하늘과 땅은 영원한데, 그것이 영원한 까닭은 자기 스스로를 위해 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인은 그 몸을 뒤로 하기에 앞서게 되고, 자기를 버리기에 자신을 보존한다. 나를 비움으로 진정 나를 완성하는 게 아닌가.”(『노자』7장)
존재의 근원으로서 천지(天地)는 영원하다. 인간은 이 천지(천지)를 벗어날 수가 없다. 그래서 ‘천지인’(天地人) 삼위일체다. 성인(聖人)은 자기를 버리기에 자신을 영원히 보존한다. 나를 비우는 것이 나를 완성하는 길이다. 해서 “죽기 전에 죽으면 죽어도 죽지 않는다.”(If you die before you die, you will not die when you die.)고 했다. 김흥호(2013) 선생은 “내가 있다 그러면 난 없어지고, 내가 없어져야 내가 있다”면서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랬다.
『노자』 8장에 유명한 ‘상선약수’(上善若水)가 나온다. 노자는 수준 높은 삶을 영위하는 훌륭한 덕을 말 할 때에 물(水)을 즐겨 인용한다.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는다. 모두가 싫어하는 낮은 곳에 처하기를 좋아한다. 그러기에 도에 가깝다.”(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故幾於道. 『老子』第八障) 물은 자기 외의 모든 것들을 이롭게 할뿐, 그들의 이익을 뺏으려 다투지 않는다. 언제나 낮은 곳을 향하기에 ‘상선약수’(上善若水)다. 우리는 물을 통해 ‘순천응인’(順天應人)의 슬기를 배우게 된다.
이어 『노자』(9장)에는 “쥐고 있으면서 더 채우려는 것은 그만두느니만 못하다.”(持而盈之, 不如其己)고 했다. 여기 ‘지’(持)는 덕을 잃지 않음을 말한다. 이미 그 덕을 잃지 않았는데 또 더 채우려 하면, 반드시 위태로워지므로 그만 두느니 보다 못하다는 게다. 공자도 지나침은 부족함만 못하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공을 이루면 자신은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功遂身退, 天之道)라 했다.
『노자』는 도(道)를 체득한 사람의 마음가짐 혹은 삶의 자세를 이렇게 말해주고 있다. “예로부터 도를 체득한 사람은 ‘미묘현통’(微妙玄通)하여 그 깊이를 알 수 없었다. 겨울에 살얼음 강 건너듯 머뭇거리고, 사방 주의를 경계하듯 주춤거리고, 손님처럼 엄숙하다가도 얼음 녹듯이 포근하고, 통나무처럼 질박하며, 계곡처럼 비고, 흙탕물처럼 (세속에) 섞여 있다.”(『노자』15장) 옛날에 도를 체득한 사람은 그 깊이를 헤아리기가 어려워 이렇게 비유한 것이다. 그 인격의 깊이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이어 “도를 체득한 사람은 그득 채우려하지 않기에, 그대로 덮어둘 뿐 새로 만들지 않는다.”고 했다. 성인은 교만하지 않아 지혜를 감춘 채 억지로 이루려하지 않는다.
도(道)를 체득한 사람의 마음공부는 어떤 경지인가? 『노자』16장에는 마음을 완전히 비우고 고요함을 지키란다. 즉, ‘치허극’(致虛極)하고, ‘수정독’(守靜篤)하라. 한 편의 시처럼 이어진다. “만물이 무성하나 그 뿌리로 되돌아간다./ 근원으로 돌아가면 고요해지니 이를 일러 명(命)을 회복함이라 하고,/ 명을 회복하면 늘 그러하고, 늘 그러함을 알면(知常) 통한다./ 통하면 곧 공정하고(容乃公), 공정하면 곧 왕이 되고(公乃王), 왕이 되면 하늘과 같다(王乃天)./ 하늘과 같으면 도를 얻게 되고(天乃道), 도를 얻으면 오래 가니(道乃久), 죽을 때까지 위태롭지 않다(歿身不殆).”(『노자』제16장)
왕필(王弼; 226-249)의 『노자주(老子註)』에는 뿌리로 돌아가면(歸根) 고요해지고(靜), 고요하면 명(命)을 회복하므로 ‘복명’(復命)이라 했다. 이는 곧 천명(天命)의 회복이어서 성명(性命)의 한결같음을 얻을 수 있으니(復命則得‘性命之常), 이를 ’상’(常)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지상용(知常容) - 용내공(容乃公) - 공내왕(公乃王) - 왕내천(王乃天) - 천내도(天乃道) -도내구(道乃久)로 이어진다. 여기 ‘도’(道)는 곧 ‘성명지상’(性命之常)이어서 오래 간다. ‘성명지상’(性命之常)은 『노자』1장 첫 구절의 ‘상도’(常道)를 떠올린다. 말미의 ‘몰신불태’(歿身不殆)는 마음공부를 몸의 공부로 연관 지운다. 노자에게 ‘허정’(虛靜)은 마음공부이자 몸의 공부다. 무예 혹은 무술이 몸의 공부이자 마음공부인 것처럼.
‘지상용’(知常容)에서 ‘도내구’(道乃久)로 이어지는 구절에 대한 김흥호(2013)의 해석은 색다르다. ‘지상용’(知常容)을 영원이라는 걸 알게 돼야 죽음을 용납할 수 있다고 푼다. 죽음을 용납하기 시작하면 올바로 살게 되고(容乃公), 올바로 산 사람은 왕이된다(公乃王). 왕이 된다는 건 주체가 된다(王乃天)는 것이고, 주체로서 살게 돼야 하늘을 알게 된다(天乃道). 그러면 진리가 뭔가를 알게 되어 영원히 죽지 않고 살게 된다(道乃久)는 게다.
『노자』에는 “스스로 그러하다”(It is so of itself.)는 ‘자연’(自然)이 하나의 열쇠말로 등장한다. 23장의 ‘희언자연’(希言自然)과 25장의 ‘도법자연’(道法自然)이 그 좋은 용례다. 23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말은 적은 게 자연스럽다(希言自然). 그러므로 회오리바람은 아침나절을 넘기지 못하고, 퍼붓는 소나기는 하루를 넘기지 못한다. 누가 이렇게 하는가? 하늘과 땅이다. 하늘과 땅도 오래 지속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사람에게 서랴.” 인간의 말은 유위(有爲)의 소산이다. 유위는 결국 우리에게 허(虛)를 앗아간다. 『노자』35장에서는 “도(道)에서 나오는 말은 담담하여 아무런 맛이 없지만, 그 말이 자연스러워 완벽한 말”이라 했다. 깊이 깨쳐 아는 사람은 말이 없다.
『노자』 81개의 장에서 사상적으로 가장 포괄적이면서 핵심적인 장으로 25장이 꼽힌다. 「혼돈 속에 생성된 것이 있었으니 천지보다도 앞서 생겼다. ...(중략) 나는 그 이름을 알 길 없어, 그것을 일부러 글자로 나타내어 도(道)라 하고, 억지로 이름 지어 크다(大)고 말하지. ...(중략) 그러므로 도는 크고, 하늘은 크고, 땅은 크고, 왕(사람) 또한 크도다. ...(중략)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는데, 도는 스스로 그러함(自然)을 본받을 뿐이다.」(有物混成, 先天地生. ...(中略) 吾不知其名, 字之曰道, 强爲之名曰大. ...(中略) 故道大, 天大 , 地大, 王亦大. ...(中略)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老子』第25障)
천지(天地)는 혼성(混成)의 상태에서 선택된 가능성이며, 그 천(天)과 지(地)는 시간 속에서 어지럽게 섞여 있는 만물과 상호교섭 한다. 그런데 그 혼성자가 누구의 아들인지 알 수가 없어 “천지보다 앞서 생겨났다”고 말한 것이란다. 이름이란 어떤 형체의 규정성과 관련된다. 그러나 도(道)는 어떠한 형체적 규정성도 거부하기에, 그 이름을 알 수 없다는 게다. 그러나 굳이 문자로 나타내자니, 도(道)라 말 한다. 그리고 억지로 이름지어 ‘크다’(大)고 한 것이다. 그 크기로 말하면 도(道), 천(天), 지(地), 그리고 사람 중의 왕(王)도 크다. 즉, 道-天-地와 필적만한 것으로 사람(王 =人) 역시 크기에 사대(四大)다. 마지막 절정에서 이렇게 말한다.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즉,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道)를 본받고, 도(道)는 스스로 그러함(自然)을 본받는다. 그런데 여기 사람(人)은 地-天-道 모두에 연관된다. 따라서 사람은 땅을 본받고, 사람은 하늘을 본받고, 사람은 도(道)를 본받아 스스로 그러함(自然)의 경지까지 도달하는 것이다. 그래서 천․지․도(天․地․道)와 더불어 사람(人)이 큰 것이다. 이 모든 차원을 관통하는 게 사람이요, 그 중에 사람이 으뜸(王)이다. 필자가 보기에 노자철학은 높은 수준에서 자연주의와 인간주의를 결합한 것이다.
여기 스스로 그러한 ‘自然’에 대한 왕필(王弼)의 주석이 탁월하다. 왕필은 “自然者, 無稱之言, 窮極之辭也”라 해서 ‘自然’이란 말로 뭐라 칭할 수 없어, 언어의 극한을 말하는 것이란다. 즉, ‘말이 안 되는 말’이다. 『노자』에서 ‘스스로 그러함’(自然)은 ‘함이 없음’(無爲)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해서 노자철학에서는 자연의 섭리를 ‘자연이연’(自然以然)이라 하여 ‘스스로 그러함으로써 그러하다’고 했다. 『노자』는 전후의 맥락을 이어가기가 어려운 고전이다. 그래서『노자』는 읽고 분석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그 느낌이 중요하다고 했는가 보다.
『노자』27장에 이런 말이 나온다. “착한 사람은 착하지 못한 사람의 스승이며, 착하지 못한 사람은 착한 사람의 거울이다. 그 스승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그 거울을 아끼지 않으면, 지혜롭다 할지라도 크게 미혹될 것이다. 이를 일컬어 현묘한 요체라 한다.”(善人者 不善人之師, 不善人者 善人之資. 不貴其師 不愛其資 誰智大迷 是謂要妙.) 이 세상에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여기 선인(善人)과 불선인(不善人)은 이분법으로 갈라지는 게 아니라, 나의 실존 속에 함께 있다. 해서 착한 사람은 나의 귀한 스승이고, 착하지 않은 사람은 거울처럼 내게 반면교사가 된다. 살아가면서 귀한 스승을 갖지 못한 사람은 참으로 불행하다. 그러나 자신을 향한 반면교사를 발견하지 못하면 더욱 불행해 질 수 있다. 여기에 삶의 오묘한 이치가 있다.
『노자』29장에서 “천하는 신령스러운 그릇이어서, 도무지 거기에다 뭘 할 수가 없는 것”(天下神器, 不可爲也)이라 했다. 세상을 휘어잡기 위해 함부로 설치지 말라는 것인가. 여기서도 ‘무위’(無爲; trying without trying)를 내비친다. 세상과 자연에 대한 외경(畏敬)의 마음가짐을 말하고자 함인가. 그래서 “성인(聖人)은 극심한 것을 버리고(去甚), 사치한 것을 버리고(去奢), 과분한 것을 버린다(去泰).”고 했다. 노자는 삶의 세 가지 원칙을 통해 자기 삶의 실존적 고백을 이렇게 하고 있다. “나에게 세 가지 보배가 있는데 이를 늘 지니고 지킨다. 첫째는 자애로움(慈)이다. 둘째는 검소함(儉)이다. 셋째는 천하에 감히 앞서지 않음(不敢爲天下先)이다.”(『노자』67장)고 했다. 이것(즉, 慈․儉․不先)은 위의 거심(去甚)․거사(去奢)․거태(去泰)와 서로 연관된다.
『노자』는 “도(道)는 언제나 뭐라 이름 지을 수 없는 것(道常無名)이지만, 도(道)가 천하에 있다는 걸 비유하자면, 온갖 계곡의 냇물이 강과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것과도 같다.”(『노자』32장)고 했다. 여기서 도(道)는 무명(無名), 즉 비상명(非常名)과 강해(江海)에 비유되고 있다.
결국, 노자의 도(道)는 스스로 그러함(自然)이고, 빔(虛)이자 고요(靜)이고, 무위(無爲)이자 무명(無名)이고, 질박한 통나무(樸)이고, 계곡(谷)이자 바다(海)와 같은 것이다. 이런 도(道)를 체득한 사람은 죽어도 죽지 않는 사람(死而不亡者壽)이어서, 천수(天壽)를 다하는 사람이란다. 이상이 『노자』 상편인 『도경(道經)』의 마음공부 요지다.
2.
『노자』38장에서 81장까지는 하편 『덕경(德經)』에 해당된다. 노자에게 덕(德)은 도(道)의 실천에 따라오는 ‘힘’이다. 그래서 도(道)는 체(體)이고, 덕(德)은 그 용(用)이다. 『노자』하편(『德經』) 첫 장에서는 ‘상덕’(上德)과 ‘하덕’(下德)을 말한다. 「큰 덕은 덕 같지 않으나 그래서 덕이 있고, 작은 덕은 덕을 잃지 않으려 하지만 그래서 덕이 없다. 큰 덕을 지닌 사람은 애써 작위하지 않지만, 작은 덕을 지닌 사람은 일부러 작위한다. ...(중략) 그래서 대장부는 후덕하게 행동하고 각박하지 않으며, 그 참된 열매에 처하되 꽃에 머무르지 않으므로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취하는 것이다.」(上德不德 是以有德, 下德不失德 是以無德. 上德無爲而無以爲, 下德爲之而有以爲. ...(中略) 是以大丈夫處其厚 不居其薄, 處其實 不居其華. 故去彼取此. 『老子』38障)
여기 ‘상덕’(上德)은 성인의 큰 덕이요, ‘하덕’(下德)은 보통사람의 작은 덕을 일컫는다. 하지만 보통사람이 끊임없이 노력하는 동안에 성인의 경지에 이른다. 필자는 여기 ‘下德’은 『중용』의 ‘誠之’에 대응하고, ‘上德’은 ‘誠者’에 대응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큰 덕과 작은 덕은 별개의 덕이 아니라, 작은 덕이 쌓여야 큰 덕에 이른다. 근데 스스로 작은 덕에 취해 굳이 티를 내면 그 덕마저 잃고 만다. 덕(德)은 남이 인정해줘야 득(得)이 된다. 큰 덕이 체화(體化)된 대장부는 그 행함이 후덕하고, 삶의 외면(外面)에 머무르지 않고, 그 내면(內面)을 귀하게 여긴다.
『노자』는 도(道)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이렇게 말한다. “뛰어난 선비는 도를 들으면 부지런히 행하고, 어중간한 선비는 도를 들으면 반신반의하며, 어리석은 사람은 도를 들으면 크게 비웃으니, 비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면 도라고 할 수 없다.”(上士聞道 勤而行之, 中士聞道 若存若亡, 下士聞道 大笑之, 不笑不足以爲道. 『老子』41障). 여기 ‘상사’(上士)는 선비로서 그 뜻을 얻은(得志) 사람이다. 이미 뜻을 얻었으니 남의 비웃음거리가 되더라도 묵묵히 제 갈 길을 가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런 선비의 ‘말 없는 가르침’(不言之敎)이 무서운 거다.
『노자』는 만족함을 아는 것(知足)을 덕으로 삼는다.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그래야 오래 간다.”(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 『老子』44障)고 했다. 그래서 “화(禍)는 만족할 줄 모르는 것보다 큰 것이 없고, 허물은 얻으려 욕심내는 것보다 막심한 것이 없으니, 만족함을 알아서 얻은 만족은 항상 스스로를 족하게 한다.”(禍莫大於不知足 咎莫大於欲得 故知足之足 常足矣. 『老子』46障)고 했다. 이(利)를 따르는 사람에겐 만족의 끝이 없으나, 도(道)를 따르는 사람은 자족(自足)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다.
문밖을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헤아리는 사람(不出戶 知天下)은 위대하다. 해서 “성인은 나돌아 다니지 않아도 알고, 보지 않아도 이름 지을 수 있고, 작위하지 않고도 이룬다.”(聖人不行而知 不見而名 不爲而成.『老子』47障)고 했다. 결국, 도(道)는 내 마음 속에 녹아 있어야 한다. 우리가 뭘 배운다는 건 날로 더하는 것(爲學日益)이지만, 도를 따른다는 것은 날로 덜어내는 것(爲道日損)이다. 다시 무위(無爲)와 빔(虛)을 말하면서, 도(道)의 내면화를 강조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장자(莊子)는 ‘마음굶기기’(心齊)를 말했다.
『노자』50장은 삶과 죽음의 문제인데, 주석가의 해석이 분분하여 갈피를 잡기 어렵다. 왕필(王弼)의 『노자주』를 옮겨 보면 이렇다. “세상에 태어났다가 죽으면 되돌아가는데, 제대로 사는 이들이 열에 셋이고, 죽는 이들이 열에 셋인데, 잘 살다가 죽을 곳으로 가는 이들이 또한 열에 셋이 있다. 왜 그런가? 너무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出生入死, 生之徒十有三, 死之徒十有三, 人之生動之死地 亦十有三. 夫何故? 以其生生之厚. 『老子』50障)
본문의 ‘십유삼’(十有三)은 10분의 3이라는 뜻이다. ‘출생입사’(出生入死). 세상에 태어났다가 죽으면 되돌아간다는데, 어디로 돌아가는가? 태어나기 전의 본래자리로 돌아가는가? 오강남 교수는 위 문맥에서 사람의 일생을 대체로 삼등분하여 처음은 삶에 대한 관심만으로 사는 삶, 끝은 죽음을 생각하면서 사는 삶, 그 중간은 삶에 대한 관심만으로 사는 삶에서 죽음을 생각하며 옮겨가는 중간 단계의 삶 등으로 나눈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이장의 가르침은 “우리가 삶과 죽음에 구애받지 않고 초연한 태도를 취하게 될 때, 진정으로 자유스런 참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이 그 요점이라 했다.
김충열 교수는 사람이 태어나서 죽음으로 가는 생애에서 10분의 3은 생의 지분이고, 10분의 3은 사(死)의 지분이고, 나머지 3분의 1 정도는 생과 사의 중간 거리인데, 여기서 생(生) 쪽으로 더 가면 건강한 삶이 된다는 것이다. 이 장에서 노자가 말하는 ‘섭생’(攝生)은 생과 사의 지분을 잘 조절하는 행위이고, ‘양생’(養生)은 사의 지분을 빼앗아 생의 지분으로 늘려가는 것이라 했다. 근데 양생의 과정에서 사람들은 균형유지라는 생존의 안정성을 위한 중요한 법칙(즉, 攝生)을 위배하기 일쑤라는 것이다.
‘출생입사’(出生入死). 태어나서 되돌아감이 죽음이다. 삶과 죽음은 순환이자 ‘하나’(동일함)로 이어지는 과정이다. 류영모 선생은 하루하루를 일생(즉, 一日一生)처럼 살고자 했다. 잘살면 잘죽는다. 우리에게 9988의 양생(養生)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삶과 죽음의 균형을 잡아가는 섭생(攝生)이 종요롭다. 왕필(王弼)은 “섭생(攝生)을 잘하는 이는 살려고만 하지 않기 때문에 죽을 곳이 없다”고 했다.
노자는 천하 만물의 시원으로 도(道)를 말한다. 『노자』52장에 “천하 만물에는 시원이 있어서 그것이 천하의 어미가 되나니, 어미를 얻어서 자식을 알고 자식을 알아서 다시 그 어미를 지킨다면, 평생 위태롭지 않을 것이다.”(天下有時 以爲天下母, 旣得其母 以知其子, 旣得其子 復守其母, 歿身不殆. 『老子』52障)고 했다. 여기서 어미란 존재의 근원이자 시원으로서 도(道)를 말한다. 왕필은 어미는 뿌리고 자식은 말단이어서 “뿌리를 얻어 말단을 알지만, 뿌리를 버리고 말단을 쫓지 않는다.”고 했다. 여기서 왕필의 본말론, 즉 ‘숭본식말’(崇本息末)론이 제기된다. 도(道)를 체득하는 과정에서 본말전도(本末顚倒)를 경계하기 위함이다. 위에서 “그 어미를 지킨다면 평생 위태롭지 않을 것”이라는 대목을 김충열 교수는 이렇게 풀이한다.
우리는 도(道)에서 왔지만 도를 알지 못했고, 자연 속에서 살지만 자연의 고마움을 미처 몰랐다. 자식이 어머니를 모르고 살아온 것과 같다. 이제 어머니의 존재가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으니, 천애고아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 부모 입장이 되고 부모 심정이 되어서 세상의 만사만물과 어울려 서로 친근하게 살아가야 한다. 그리한다면 그야말로 천당극락과 다름없는 생을 향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몰신불태’(歿身不殆)의 해석이 되지 않을까(김충열, 2004, p.261).
그 풀이가 명쾌하다. 도(道)와 자연(自然)은 우리의 어머니란다. 도체(導體)인 어미를 받들고 끝까지 지켜낸다면, 평생 내 몸이 위태롭지 않게 된다는 게다. 그래서 장의 말미에서 내 몸에 재앙을 남기지 않으려면(無遺身殃), 하나같이 도(道)를 익혀 지녀야(習常) 한다고 다시 강조했다. 여기 ‘습상’(習常)이 『노자』백서본에는 ‘습상’(襲常)으로 되어 있어, 오강남 교수는 ‘영원을 배워 익힘’으로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김충열 교수는 그냥 ‘습상’(習常)으로 읽어, 도(道)의 상(常)을 습득하거나 습행(習行)한다는 뜻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장에서는 내면적으로 도(道)와 하나가 되는 삶을 한 번 더 강조하고 있다. 그런 삶의 체득 혹은 체화(體化)를 ‘습상’(習常)이라 했다.
앞에서 잠시 말했듯이, 노자는 자기에게 세 가지 보물이 있다고 했다. “나에게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 이를 간직하고 있나니, 하나는 자애로움(慈)이고, 둘은 검약(儉)이고, 셋은 감히 천하에 나서지 않는 것(不先)”(『노자』67장)이라 했다. 일컬어
자(慈)․검(儉)․후(後)라고 한다. 공자는 ‘인’(仁)을 말했고, 석가는 ‘자비’(慈悲)를 말했고, 예수가 ‘박애’(博愛)를 말했다면, 노자는 ‘자애’(慈)를 말했다. 모든 종교에는 그 바탕에 ‘자애’(慈)를 깔고 있다. 종교적 가르침의 공통분모다. 근데 나머지 두 보물은 노자다운 것이어서 더욱 돋보인다. 즉, 검약(儉)과 감히 앞장서지 않는(不先) ‘겸양’이다. 소박하게 살고 굳이 세상에 앞서지 않으니 그 삶이 ‘유유자적’(悠悠自適)하다.
『노자』는 하늘의 도를 활줄 당기는 것에 비유하여, 우리에게 분배 정의를 말해준다. “하늘의 도는 활줄을 당겨 매는 것 같다. 높으면 억누르고 낮으면 들어올리며, 남으면 덜고 부족하면 보태준다. 사람의 도는 그렇지 않아서 부족한 데서 덜어다가 남는 쪽에 갖다 바치나니, 남는 것을 덜어내어 천하를 봉양할 수 있는 이는 오직 도를 지닌 사람일 뿐이다.”(天之道 其猶張弓與. 高者抑之 下者擧之, 有餘者損之 不足者補之. 人之道則不然 損不足以奉有餘 孰能有餘以奉天下 唯有道者. 『老子』
77障)
하늘의 도는 마치 활을 쏘는 형국과 같아 높은 곳은 내리누르고 낮은 곳은 추켜올린다. 이것은 남아도는 것을 덜어주고 부족한 것을 보충해 주는 것과 같다. 그런데 사람의 길은 그렇질 못하고 오히려 부족한 데서 덜어다가(빼앗아) 남아도는 데에 채워준다. 누가 능히 남아도는 것으로 천하 사람들을 채워 줄 수 있는가? 그 사람이야말로 도(道)를 체득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이제 ‘소국과민’(小國寡民)의 목가적(牧歌的) 삶을 읊으며, 『노자』를 닫는다.
나라는 작고 백성은 적어,
편리한 기계가 있으나 쓸 일이 없고,
백성들은 죽음을 중히 여겨
멀리 옮겨 다니지 않는다.
배와 수레가 있지만 탈 일이 없고,
무기가 있지만 쓸 일이 없다.
...(중략)
이웃 나라가 서로 바라보이고,
닭 울고 개 짖는 소리가 들려도
백성들은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하는 일이 없어라.
이것은 노자가 그린 삶의 풍경화다. 노자가 이상향으로 그리는 ‘소국과민’(小國寡民)은 ‘자연이연’(自然以然)에 기반 한 이상적 삶의 공동체다. 배와 수레가 있지만 탈 일이 없고, 기계와 무기가 있지만 쓸 일이 없는 삶이다. 닭 울고 개 짖는 소리가 들리는 이웃마을에 살아도 서로 왕래를 않으니, 참으로 한적하고 한가롭다. 나서 죽을 때까지 그가 살던 마을을 떠나지 않는 게 노자의 유토피아다. 너무 목가적(牧歌的)이어서 서글픈 마음이 든다.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향수(鄕愁) 때문일까. 그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다. 김병하(2014.0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