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행’(自利行)은 이타행(利他行)에 상응하는 불교 수행을 지칭하는 용어다. 불교의 수행방법 중 ‘시문’(施門)이 이타행(利他行)의 전형이라면, ‘지관문’(止觀門)은 자리행(自利行)의 전형적 형태다. 여기 ‘지관’(止觀)은 육파라밀(六波羅蜜)의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를 합친 것으로 ‘멈춤’(止)과 ‘살핌’(觀)이다. 즉, ‘상념의 정지’(止)와 ‘본질의 통찰’(觀)을 함께 아우르는 수행이다. 기신론에서는 이것을 ‘지관쌍수’(止觀雙修)라 했고, 지눌(知訥)은 이를 ‘정혜쌍수’(定慧雙修)로 표현했다.
이홍우(李烘雨) 교수는 정년 후에 펴낸 『대승기신론통석』(2006)에서 자리적(自利的) 삶의 이익에 대해 명쾌한 해석을 내렸다. 여기 ‘자리’(自利)라는 말은 ‘이타’(利他)에 대비되는 ‘이기’(利己)라는 말과는 명백한 차이를 가진다. ‘이기’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남에게 해를 끼치면서까지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인 반면에, ‘자리’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개입시키지 않은 채로 스스로를 이롭게 하는 것이다. 근데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개입시키지 않는 삶’이란 원칙적으로 있을 수 없다. 이 문제는 ‘서로주체성’과 관련하여 뒤에 좀 더 체계적으로 다루어 볼 터이다.
일반적으로 우리 삶의 중심을 이루는 가정생활과 직장생활은 이타적 삶의 표현이다. 여기에 내밀한 동기로 이기적인 측면이 언제나 개입될 수야 있겠지만, 그 목적은 원칙적으로 이타적일 수밖에 없다. 이홍우는 “도덕적인 면에서 남의 지탄을 받지 않고 가정생활과 직업생활을 원만하게 영위한 사람이라면 그는 잘 산 것이며 좋은 삶을 산 것”이라 했다. 평범하고 당연한 삶이지만 따지고 보면 결코 쉽지만은 않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모범적인 삶’을 산 사람이라 해도 좋다. 이게 삶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산다는 게 바로 그런 거라 해도 무방하다.
여기서 노년기 삶의 반전(反轉) 가능성이 보인다. 이를테면, 지금 나 같은 처지의 사람은 이타적 삶의 멍에에서 해방된 만큼 자리적(自利的) 삶을 향유할 절호의 기회를 맞은 셈이다. 평생의 업으로 교수 노릇도 무사히 끝냈고, 이제 자녀들도 자기 앞 가름할 정도는 되었으니 예의 ‘모범적인 삶을 산 사람’의 반열에 낄만하다. 근데 문제는 이제부터다. 더 이상 이타적 삶을 살 필요가 없게 된 노년의 내가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아무런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스스로 ‘자리적 삶’을 향유할 수 있는 그런 삶은 어떤 것이겠는가?
흔히 정년 후에 인사조로 사람들이 묻는 것이 요즘 어떻게 소일(消日)하느냐는 말이다. 국어사전에 보니 ‘소일’(消日)이라는 말이 보기에 따라 좀 민망하기도 하고 좋은 뜻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국어대사전』(이희승)에는 ‘소일’을 “하는 일 없이 세월을 보냄”이라 해놓고, 이어 “어떠한 것에 재미를 붙여 세월을 보냄”이라 했다. 문제는 어찌 세월을 보내느냐에 의해 ‘소일’의 의미는 천양지차(天壤之差)로 달라진다는 게다. 어떤 사람은 요즘 어찌 소일하느냐고 물으면, 그냥 빈둥거리는 재미로 산단다. 하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빈둥거리면서 자신의 삶을 즐긴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터. 여가를 즐긴다는 건 일하는 삶의 틈새를 잠시 즐긴다는 의미이지, 세속적 취미나 놀이로 온통 삶을 즐긴다는 것은 아니다.
『논어』 첫 머리에 “때로 배우고 익히니(學而時習之) 이 또한 기쁜 일이 아닌가?”라 했다. 공자는 평생에 걸쳐 배움의 즐거움을 으뜸으로 삼은 사람이다. 공자의 호학(好學)하는 삶은 말년에 하고 싶은(맘먹은) 대로 해도 결코 도(道)에 어긋남이 없는 그런 자리적 삶을 즐길 수 있게 했을 터. 스스로 배움을 즐기는 것이야 말로 삶의 내재적 목적이자 교육의 본래 목적이다. 이홍우는 자리적 삶과 교과공부의 내적 연관을 이렇게 말한다.
이 자리적 삶은 불교에서 말하는 자리행과 마찬가지로, 지관문(止觀門) 수행이 실현하고자 하는 삶이며, 차라리 지관문 수행 그 자체입니다. 저는 지관문 수행은 종교와 교육의 차이를 감안한다면, 그 내용에 있어서 학교의 교과공부와 다름이 없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불교의 지관문 수행은 교과공부를 종교적 수행의 형태로 정련한 것에 해당합니다. 지관문 수행과 교과공부는 다같이 ‘심성함양’(心性涵養)-즉, 학문과 도덕, 예술과 종교에 가능한 한 깊이 입문함으로써 그 이면에 들어 있는 심성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리적 삶은 간단하게 말하여 ‘교과를 공부하면서 사는 삶’ - 즉, 교과를 공부하는 것 -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심성함양은 우리 자신의 마음을 아름답게 가꾸는 일인 만큼 어느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에게 ‘이익’이 되며, 그 일은 다른 사람이 나를 대신해 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거나 다른 사람의 삶에 방해가 되지도 않습니다(이홍우, 2006, pp.247-248).
전술한 것처럼 자리적 삶은 지관문(止觀門) 수행과 맞닿아 있다. 그리고 지관문 수행은 교과공부를 종교적 수행의 형태로 정련(精鍊)한 것이다. 지관문 수행과 교과공부는 ‘심성함양’(心性涵養)을 목적으로 삼는다. 이 ‘심성함양’은 자리적 삶에 내재하는 순결한 이익이다. 그리고 자리적 삶에서의 ‘이익’은 그 삶을 사는 사람에게 이익이 된다고 스스로 생각할 때에만 얻어지는 그런 성격의 것이다. 해서 이 이익은 이타적 삶에서 얻어지는 이익과는 비교가 되질 않는다. 전자의 이익이 ‘마음 안의 공덕’이라면 후자의 이익은 ‘바깥의 공덕’이다.
『대승기신론』의 말미에 “한 끼 밥 먹을 동안 기신론의 가르침에 대하여 올바른 사색을 하고, 나아가 기신론의 의미를 세밀히 살피고 그에 따라 수행하기를 하루 낮 하루 밤을 하는 동안에 쌓는 공덕”은 바로 ‘마음 안의 공덕’이자 자리적 삶의 이익이다. 이것은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중생을 교화하여 10 선을 행하도록 하는 것”을 위시해서 중생들을 위해 불사(佛事)를 일으키는 것과 같은 ‘바깥의 공덕’에 비하여 “한도 끝도 없이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으며, 설사 시방 세계의 모든 부처가 각각 무수겁의 세월을 두고 그 공덕을 찬양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부족하다.”고 했다. 이처럼 마음 안의 공덕과 바깥의 공덕은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질적인 차이다. 전자는 무한(無限)이지만 후자는 유한(有限)이다.
이 세상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치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개입시키지 않고 온전히 자리적 삶을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에게 자리적 삶과 이타적 삶은 따로 떨어진 두 개의 삶이 아니라, 하나의 삶에서 동시에 수반되는 서로 다른 방향을 지칭한 것에 불과하다. 이홍우는 이 두 가지 삶의 방향을 설명하는 적절한 비유로 기신론에서 말하는 심진여문(心眞如門)과 심생멸문(心生滅門)이 시사하는 ‘이문 불상리’(二門 不相離)를 들고 있다. 여기서 자리적 삶은 이타적 삶에 대하여 중층구조의 위층에 해당하며, 이타적 삶이 따르는 기준을 나타낸다.
예로부터 우리에게는 이 자리적 삶의 특권을 선비(士)들에게 부여하였고, 그것은 신분상의 특혜이자 임무였다. 맹자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제에서 선비를 제외한 농공상에 종사하는 일반 사람들에게는 의식주에 필요한 일정한 재산이 없으면 삶에서 견지되는 일정한 마음도 기대할 수 없다고 했다. 즉, 무항산 무항심(無恒産 無恒心)이다. 근데 선비는 ‘무항산’(無恒産)일지라도 끝내 항심(恒心)을 잃지 않는 뜻을 지닌 사람(志士)이어야 한다. 무서운 말이다. 교육 받은 사람이 선비답게 사느냐 않느냐 하는 것은 오로지 선비의 그 마음, 즉 ‘志’ 에 달렸다. 선비는 농공상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달리 생계수단으로 육체노동을 하지 않는 ‘특권’을 누리지만, 그 특권은 선비(士)가 자신에게 주어진 고유한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도록 보장하는 칼날 같은 장치일 뿐이다.
오늘날에는 옛날의 선비가 하던 일을 지식인들이 맡아야 한다. 지식기반사회에서 지식인 계층은 두루 열려 있다. 하지만 그 많은 지식인들 중에 유독 옛 선비들에게 요구되는 내재적 임무를 전형적으로 떠맡아야 할 부류는 교수를 포함한 교사집단과 성직자들이다. 왜 그런가? 교사집단은 전적으로 배움을 이끄는 표적집단이고, 성직자들은 깨침을 이끄는 것이 존재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자리적 삶을 충실히 사는 만큼 거기에 영향 받은 사람들도 그렇게 살게 될 터이다. 기신론에 의하면, 이렇게 해서 중생이 여래와 함께 큰 수레를 타고 진여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게다.
이렇게 말하는 나 자신은 평생 교수 노릇하면서 항산(恒産)이 보장되었고, 그것은 정년 후의 지금도 기본적으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선비로서의 항심(恒心)을 잃지 않는 그 뜻(志)에 따라 내 스스로 얼마나 충실하게 살아 왔으며 살고 있는가? 부끄럽다. 하지만, 지금 와서 어찌할 건가? 이런 때에 대비해서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는 말이 나온 것 같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면 어찌 해볼 도리가 없다. 지식인으로서 나의 삶은 어차피 빚진 삶이다. 그 빚진 게 한 둘이 아닐 터. 그 사정은 정년 후 지금도 마찬가지다. 정년하고 나이들었다고 그냥 탕감되는 게 아니다. 이쯤에서 ‘서로주체성’ 철학을 떠올리게 된다.
철학 담론으로 ‘서로주체성’의 이념은 김상봉 교수(전남대)가 제기했다. 그는 나르시시즘에 기반 한 서양철학의 전통을 ‘홀로주체성’으로 규정했다. 그는 서양의 자아는 한 번도 타자 속에서 자기를 상실해 본적이 없는 자유로운 주체의 나르시시즘이라고 했다. 그는 철학의 체계를 철저히 ‘만남’의 이념에서 정립하고자 했다. 자유와 주체성이 오직 수동적 당함으로서의 ‘만남’을 통해서만 생성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홀로주체성’을 넘어 선 ‘서로주체성’을 제기한다. 함석헌이 한국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라 했을 때, 이 고난(苦難; passio)이란 곧 수동적 당함의 상태이자 결과다.
철학은 세계와 역사에 대한 자기인식이자 현실의 자기반성 과정이다. 신채호 선생이 “조선 사람은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고,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主義)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고 나무랐다. 이것은 우리에게 자기반성 혹은 자기인식으로서 철학의 빈곤을 꾸짖는 것일 터. 근대는 인간의 주체적 자기의식의 산물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근대는 2중적 소외였다. 즉, 우리는 예전의 자기로부터도 소외되고, 서양에 의한 새로운 자기로부터도 소외되는 개화기 지식인의 상황(즉, 2중 소외)을 고스란히 떠안고 오늘에 이르렀다.
함석헌 선생은 이런 우리를 남편이 다섯인 사마리아 여인에 비유했다. 그는 다섯 남편 누구도 내 영혼의 주인일 수 없다고 했지만, 김상봉 교수는 실제로 그 모두가 우리 영혼의 주인으로 회통(會通)되는 가능성에 주목했다. 그는 “처음부터 자유인이 아니었고 정신적 노예 상태에서 자기를 일으켜 자유를 얻으려는 우리에게 주체성이란 어떤 것이겠는가?” 라고 묻는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그는 철학가들 대신에 당대 시인들이 자기가 누구인지를 물은 것에 주목한다. 윤동주의 「자화상」과 「참회록」에 나타난 자기에의 부끄러움, 자기동일성의 상실이야말로 다른 주체성의 징표, 곧 ‘서로주체성’의 정립 가능성이다.
자기를 잃어버린 시대에 자기가 누구인지를 끈질기게 물으면서 ‘철학함’을 살아온 다석(多夕) 류영모(柳模永; 1890-1981) 선생은 고난의 땅에서 싹을 틔운 ‘우리철학’의 증인이다. 다석은 우리의 영혼을 지배하려는 모든 타자적 세계관을 상대화함으로써 주체적인 자기정립을 위한 공간을 확보하고자 했다. 김상봉에 의하면, “다석은 우리가 받아들인 모든 종교와 철학을 똑 같이 뛰어넘으려 했던 것처럼, 그 모든 것을 평등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려고 했다.” 해서 다석에게는 모든 경전이 곧 복음이다.
다석은 재야에서 다양한 종교의 경전들을 강의하면서, 그 과정에서 여러 종교와 철학을 회통함으로써, 그들 사이에 다리를 놓고 서로 만나는 가능성을 찾고자 했다. 이런 일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다석은 다섯 남편을 가진 사마리아 여인의 수난을 전도(顚倒)하여 도리어 그 여인의 수난을 보편적 진리와 보다 ‘큰 나’에 이를 수 있는 지평으로 바꾸고자 했다. 그 여인은 남편을 다섯이나 가졌던 까닭에 어떤 남편도 완전한 남자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을 터이다.
김상봉은 바로 여기에 타자 속에서 자기를 상실한 정신의 희망을 보았다. 그 희망은 저 사마리아 여인이 더 이상 다섯 남편들에게 종노릇하지 않고 그들을 대등하게 보듬어 사랑할 때 비로소 꽃을 피울 것이라 했다. 만해(萬海) 한용운의 “나는 곧 당신이여요”라는 고백 속에는 ‘서로주체성’이 단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홀로주체성은 타자적 주체를 배제하지만, 여기 서로 주체성은 타자적 주체와의 ‘만남’을 통해 ‘생성되는 주체성’이다. 서로주체성은 타인과의 인격적 만남을 통한 ‘과정’으로서의 주체성이지, 자기동일성을 거듭 확인하는 실체로서의 주체성이 아니다. 서로주체성에서 자기는 언제나 타인에게 빚지고 있다. 자기됨과 타자와 만남 사이의 긴장에서 서로주체성은 잉태된다. 물론 이 때의 ‘만남’은 인격적 만남이자 배움의 만남이어야 한다. 그것은 동학이 말하는 ‘내 마음이 곧 네 마음’(吾心如心)인 그런 만남이다.
여기 ‘만남’은 내가 내면적인 나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을 비롯한 모든 인격적 만남이다. 부름에 빚지는 나와 너의 만남은 내가 온전한 주체가 되는 과정에서 그 끝이 없다. 이 끝없는 과제를 김상봉은 만남의 깊이와 크기로 나눈다. 그는 그 만남이 성실하면 성실할수록 깊이를 더하고, 그 폭이 넓을수록 큰 만남이라 했다. 그리고 이 만남에 의한 서로주체성은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순수한 활동의 현실태다. 만남의 성실함에서 부름과 응답이 만들어 내는 서로주체성을 김상봉은 이렇게 말한다.
만남의 응답 속에서 수동성과 능동성은 공속한다. 부름에 응답할 때, 나는 나에게 돌아간다. 내가 부름 받고 있다는 것을 의식함으로써 - 내가 생각한다는 것이 아니라! -나는 나를 의식한다. 부름 받고 있는 자가 남이 아니라 바로 나라는 것을 내가 의식할 때, 나는 나를 가장 또렷하고 치열하게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부름에 응답할 때 나를 넘어간다. 어디로 넘어가는가? 너에게로 넘어간다. 이것이 가장 근원적인 의미의 초월이다. ...(중략) 응답 속에서 자기복귀와 자기초월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은 응답 속에서 내가 나를 가장 또렷이 의식하면서 너에게로 나아가고, 너에게로 나아가면서 나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나와 네가 둘이면서 하나요, 하나이면서 둘이다. 이처럼 나와 네가 서로 나아가고 돌아가면서 하나 될 때, 그 만남 속에서 생성되는 주체성을 가리켜 우리는 ‘서로주체성’이라고 부른다(김상봉, 2007, p.286).
이 때 나는 오직 나를 걸고 너의 부름에 응답하는 한에서 자유로운 주체가 된다. 그에게 살아 있는 것은 자기를 고집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자를 위해 자기를 기꺼이 내려놓을 줄 앎으로써 살아 있는 자가 된다. 참된 만남이란 너를 받아들이기 위해 나를 비우는 일이다. 그런즉 만남의 내면적 깊이는 타자를 향한 자기상실 혹은 비움의 깊이다. 이것이 만남의 내적 온전함이다. 그는 타자를 향해 자기를 닫아버리는 정신의 타성으로 한국사회에서 ‘학벌주의’를 경계한다. 한국사회에서 현대적 신분제로서 ‘학벌주의’ 병폐를 문제 삼는다. 그에게 『학벌사회』(2004)는 사회적 주체성에 대한 철학적 탐구 과제이기도 했다.
만남의 온전성은 ‘배움’의 깊이와 절실함에 달려 있다. 배움은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만남이다. 나와 네가 서로에게 배울 때, 서로주체성은 활동으로 존재한다. 너의 고통에 나를 걸고 응답할 때 서로주체성은 생동한다. 김상봉에 의하면, “서로주체성의 현실태는 자기의 모든 것을 걸고 타자의 고통에 응답함으로써 생성되는 ‘공동체’를 의미한다. 이것은 도달할 수 없는 이념이다. 그러나 그 불가능한 꿈을 마음에 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필연성의 노예였던 자기를 일으켜 자유로운 주체로 살아가는 삶의 길에 들어선다.”는 것이다. 이것이 빚진 삶의 존재론적 근거다. 그에게 철학은 온전한 만남을 위한 체계이고, 철학함은 언제나 근원적 실천이다.
다시 나에게로 돌아와서, 그럼 어찌할 건가? 영글지 못한 만남으로 그간 빚진 삶을 새로운 만남으로 갚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자리적(自利的) 삶의 깊이에서 서로주체성의 철학을 어떻게 체현(體現)할 수 있겠는가? 조동일(趙東一)은 상생이 상극이요, 상극이 상생이라 했다. 그의 ‘생극론’(生克論)은 한국문학사와 철학사의 만남에서 얻어진 역사철학적 거대담론이다. 여기 하나의 밑그림으로 원효(元曉)의 화쟁(和諍)철학-최제우(崔濟愚)의 개벽(開闢)사상- 류영모의 얼나(靈我)로 줄곧 뚫리는 삶 철학- 조동일의 생극론- 김상봉의 서로주체성 철학을 일련의 축으로 한 한국철학의 좌표를 설계(설정)해 본다. 나의 자리적(自利的)인 삶의 향기가 이런 설계에 하나의 벽돌 같은 보탬을 줄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이겠는가. 갈 길은 아득하고 해는 기운다. 김병하(2014.0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