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불멸과 교육가능성
최근 키케로의 『노년에 관하여』(천병희 옮김, 2005)라는 책을 읽었다. 금년에 고희(古稀)에 접어드는 나도 속절없이 노년이다. 내가 아는 키케로(M. T. Cicero; 기원전 106-43년)는 로마시대의 문장가이자 웅변가로 그 문장의 수려함이 르네상스 이후 초기의 인문적 실학주의에까지 깊은 영향을 미친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문장을 직접 대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늦었지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노년에 관하여』끝부분(전체 22장 중 21장)에서 그는 영혼불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영혼의 본성은 결코 멸(滅)할 수 없다는 것이네. 그리고 영혼은 항상 움직이지만 어떤 동인(動因)도 갖지 않네. 영혼은 저절로 움직이니까. 영혼의 이러한 움직임은 또 끝나지도 않을 것이네. 영혼이 자신을 버리는 일은 결코 없을 테니까. 그리고 영혼은 그 본성이 단일하고 자신과 같지 않거나 닮지 않은 혼합물을 내포하지 않으므로 나누어질 수 없고, 나누어질 수 없다면 멸할 수도 없네. 인간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대부분을 알고 있다는 가설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논거는 아이들이 어려운 과목들을 배우며 수없이 많은 것을 그토록 빨리 이해한다는 사실이네. 그래서 아이들은 그것들을 그때 처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상기하고 회상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라네(천병희 옮김, 2005, p.86).
한 인간은 죽어도 그의 영혼은 살아남는다.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영혼의 부름에 일치하는 삶을 사는가이다. 지난한 문제다. 프랑스의 르누아르(F. Lenoir)는 『소크라테스 예수 붓다』(장석훈 옮김, 2014)에서 이들을 ‘영적(靈的) 휴머니즘’의 창시자로 불렀다. 키케로는 영혼의 불멸에 대해 그가 소크라테스로부터 받은 영향을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아폴론의 신탁이 가장 현명한 사람으로 판정한 소크라테스가 생애의 마지막 날 영혼의 불멸에 관하여 논의했던 것을 연구했다네.”라고. 르누아르도 ‘다이몬’이라는 영혼의 신비성을 강조한 소크라테스를 주목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 안에 ‘다이몬(daimon)'이라고 하는 내면의 ’목소리‘가 존재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다이몬은 ‘정령’(精靈)을 의미하는데, 소크라테스는 신성의 발현을 다이몬이라고 했다. 델피 신탁이 그를 지명한 이후, 다이몬은 늘 소크라테스와 함께했다. 필요하다면 그를 제지했고 그가 소명을 망각한다 싶으면 그를 다시 일깨웠으며, 신탁을 대신하여 신의 말씀을 전하기도 했다(장석훈 옮김, 2014, pp.97-98).
후에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은 “그는 자기 안에는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지시하는 정령(영혼)이 있다고 말했다.”고 스승을 회고했다. 해서 제자들에게 비친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이성에 기반을 둔 철학자이면서 동시에 초자연적인 힘(즉, 영혼)과 결부된 신비주의자의 모습이기도 했을 게다. 내가 보기에 소크라테스는 지식의 산파임과 동시에 영혼의 산파를 자임한 사람이다. 소크라테스는 『파이돈』에서 “철학자란 사람들이 육신과의 관계에서부터 영혼을 분리해 낼 수 있게 하는 사람”이라 했다. 영혼불멸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은 신통하게도 키케로에게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근데 내가 정작 놀란 것은 키케로가 영혼불멸을 말하면서 이것을 모든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품부(稟賦) 받은 학습가능성과 연관지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단일한 본성을 가지고 제 갈 길을 가는 영혼을 말하면서 키케로는 인간의 생득적인 학습가능성을 말한다. “인간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대부분을 알고 있다는 가설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논거는 아이들이 어려운 과목들을 배우며 수없이 많은 것을 그토록 빨리 이해한다는 사실이네.”라고. 스스로 동인(動因)을 갖지 않는 본래성(本來性)으로서의 영혼이 인간의 무한한 학습가능성과 도대체 어떤 연관을 가지는 것일까?
이 대목에서 붓다의 가르침이 떠오른다. 성철 스님은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원래 구원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본래 부처입니다.”고 거듭 강조했다. 모든 진리는 자기 속에 구비되어 있으므로, 만약 자기 밖에서 진리를 구하면 이는 바다 밖에서 물을 구함과 같단다. 그래서 순금(純金)인 자기를 바로 보란다. 그는 ‘본래성’으로서 인간의 ‘본마음’을 이렇게 말한다.
이 (본)마음에는 일체의 지혜와 무한한 덕행이 원만 구족하여 있으니, 이것을 자연지(自然智)라고 합니다. 이 자연지는 개개가 구비한 무진장의 보고(寶庫)입니다. 이 보고의 문을 열면 지덕을 완비한 출격대장부(出格大丈夫)가 되나니, 이것이 인간 존엄의 극치입니다. ...(중략) 이 마음은 거울과 같아서 아무리 오랫동안 때가 묻고 먼지가 앉아 있어도 때만 닦아내면 본거울 그대로 깨끗합니다. 그리고 때가 묻어 있을 때나 때가 없을 때나 거울 그 자체는 조금도 변함없음과 같습니다(성철, 자기를 바로 봅시다. 1987, p.32).
여기 본마음은 본래성으로서의 영혼이고, 이것은 변함없는 ‘불생불멸’(不生不滅) 자체이다. 이 마음에는 일체의 지혜와 덕행이 원만 구족해 있어, 무진장의 보고(寶庫)이다. 여기서 인간 교육의 무한한 가능성과 교육의 신비(神秘)가 드러난다. 이 신비성을 키케로는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워 “아이들이 어려운 교과를 배우는 것은 생판 모르는 것을 처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상기하고 회상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게다.
달리 말하면, 학습은 생판 모르는 걸 배우는 게 아니라, 알 수 있으면서 모르는 걸 깨치는 과정이다. 여기에 인간 존엄으로서 교육가능성의 극치가 보인다. 그래서 나는 특수교육을 장애아동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방법으로 특별히 구안된 특수 ‘방편’(方便)교육이라고 규정한다. 거울의 본성은 원래 투명(透明)하다. 문제는 거울에 낀 때와 먼지를 어떻게 걷어 내느냐에 달려 있다. 이게 교육과 인간존재의 파라독서이자 희망이다. (2014.0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