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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세'의 역사철학적 도전과 함의

평촌0505 2024. 6. 29. 09:41

‘인류세’(Anthropocene)는 홀로세(Holocene)에 대응해 파울 크뤼천이 2000년 멕시코 국제회의에서 불쑥 뱉은 말이다. 불과 20년 남짓 사용되기 시작한 ‘인류세’ 개념은 이제 과학, 인문학, 예술,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 확산되고 있다. 본래 ‘인류세’는 지질연대표를 지칭하는 용어다. 홀로세에서 인류세로의 이행은 기후를 포함한 대기권, 해수면을 포함한 수권, 생물권, 그리고 지구표면을 구성하는 물질과 그 이동방식 을 포괄한다.

 

홀로세에서 인류세로의 이행은 이른바 ‘상전벽해’(桑田碧海)다. 그 변화를 보여주는 많은 도식(탄소배출, 콘크리트와 철강생산, 컴퓨터 보급, 육류소비, 플라스틱 소비, 쓰레기 배출 등)은 19세기까지는 거의 수평을 이루었으나, 20세기에 들어와 특히 1950년대 이후부터는 그 선이 수직으로 급상승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놀랍게도 지난 70년 동안 지구는 엄청나게 변했고, 새로운 궤적에 들어서고 있다.

 

‘인류세’는 기본적으로 지구과학 개념이지만, 다학문적 접근을 요한다. 『인류세 책: 행성적 위기의 다면적 시선』(J. A. Thomas, M. Williams, J. Zalasiewicz, 박범순, 김용진 옮김, 2024)은 인류세의 다학문적 접근을 강조하고 있다. 나는 이 책을 기반으로 ‘인류세’를 지구시스템과학 입장에서 이해하되, 역사철학적 해석에 그 주안점을 두고자 한다. 이것은 기후생태 위기의 인문학에 대한 내 나름의 의도 때문이다.

 

카이스트에 <인류세연구센터>를 설립한 박범순 교수는 “인류세라는 심오한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과학과 기술에 대한 지식도 중요하지만,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대한 이해도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자연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라는 오랜 구분은 붕괴했다. 우리는 문화와 자연의 혼종물이다. 우리는 자연문화(nature-culture)이고, 지구도 마찬가지”랬다. 우리에게 ‘인류세’란 무엇인가? 책에는 이렇게 말한다.

 

지구시스템과학은 1950년경 인간의 우위 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지구 힘의 균형을 측정함으로써, 인류세 개념을 정의한다. 수천 년 동안 구축되어 오던 인간의 집단적 네트워크 영향력은 20세기 중반 마침내 ‘자연의 거대한 힘’을 압도했다. 인류는 특정지역이나 생태계뿐 아니라 행성 전체를 지배하는 지구시스템 행위자가 되었다. 인류세는 상대적으로 예측 가능했던 홀로세의 리듬에 종지부를 찍었다. …(중략) 홀로세에서 인류의 역사발전은 홀로세의 종말을 초래했다. 안정적인 지구시스템의 상대적 평온은 깨어졌다. 마치 요가수업에 난데없이 들어온 황소처럼 토지, 식량, 물, 광물, 에너지에 대한 인간의 수요증가는 지구행성 시스템을 혼란에 빠트렸다(pp.24-25).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성장이 정치, 사회, 문화를 지배하는 힘(기준)이 되었다. 1950년부터 2010년까지 저인망 어업, 자원채굴, 건설로 인해 이동된 퇴적물 양은 인류가 생존한 30만년 동안 이동된 양보다 거의 5배나 늘어났다. 오늘날 약 80억 인구가 살고 있는 지구라는 인공적인 고치(artificial cocoon)는 이른바 ‘기술권’(technosphere)이라 불린다. 이제 ‘기술권’은 생물권보다 비중이 클 뿐 아니라 갈수록 생물권을 파손하고 있다.

 

이런 대변동을 총칭하는 말이 ‘인류세’다. 인류세는 오늘 우리에게 새로운 역사철학적 도전을 제기한다. 현대문명은 엄청난 물질적 풍요를 우리에게 선사했지만, 오늘 우리가 처한 기후생태 위기는 양날의 검과 같다. 이제 우리는 자연을 압도하는 오만한 존재인 인간성과 휴머니즘을 비판적으로 성찰하지 않을 수 없다. 인류세는 이미 시작되었고, 우리가 홀로세의 보호막으로 돌아갈 길은 지워지고 있다.

 

2009년에 결성된 ‘인류세 실무단’(Anthropocene Woirking Group)에 따르면 “인류세의 뚜렷한 시작점은 20세기 중반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급격한 인구증가, 산업화, 세계화라는 ‘대가속’(Great Acceleration)의 결과, 최근 지층 내에 축적된 보존지표의 배열과 20세기 중반 시점이 일치하고 있다”(2019)고 했다. ‘인류세’의 도래는 현대 문명이 초래한 ‘대가속’의 결과다. 그런 만큼 인류세의 역사철학은 오늘의 우리에게 주어진 ‘도전적 과제’다. 피할 수 없는 난제다.

 

굳이 ‘도전적 과제’라 함은 오늘날 약 80억에 이르는 인간의 욕망은 그 끝이 보이질 않는데, 지구자원은 그 한계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인류세는 지구시스템에 균열을 일으키는 예측하기 어려운 되먹임 고리(feedback loop)와 급전환점(tipping point)이 위험의 문턱에 도사리고 있다. 갈수록 인류세의 과학적 증거는 차고 넘친다.

 

책에서 “인류세는 우리에게 문제(problem)가 아니라 곤경(predicament)"이랬다. 문제는 해결 가능하지만, 곤경은 다면적 자원과 지혜가 필요한 도전적 상황이자 과제다. ‘곤경’은 해결 가능한 문제라기보다는 어느 정도의 품위유지를 하면서 견뎌 낼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상황이다. 역사학자 로빈(Robbin, 2008)은 “문제는 사람들이 이 변화된 세계에 어떤 책임을 지고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느냐다. 그 답은 단지 과학적이거나 기술적이지 않고 인문사회적이고 생태적”이랬다. 곤경에 처한 인류가 인류세를 역사철학의 도전적 의제로 삼아야 할 이유다.

 

‘인류세’는 거대한 시공간적 규모면에서 뿐만 아니라, 지구시스템의 총체적 인식을 위해 동원되는 엄청난 데이터 수집과 컴퓨터 모델링 측면에서도 ‘초객체’의 문제다(Edwads, 2010). 2018년에 밍크스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협의체(IPCC)에서 지나치게 방대한 데이터로 인해 제6차 평가보고서 작성에 어려움이 있다고 했다. 놀라운 것은 밍크스의 추정치에는 토지사용 변화나 생물다양성에 대한 정보도 없고, 기후변화에 관한 것만 포함되어 있다는 게다.

 

‘인류세’는 인간이 다룰 수 있는 시공간의 규모와 정보처리 능력의 한계를 벗어나고 있다. 때문에 ‘인류세’라는 ‘초객체’를 어떻게 인간의 가치와 정치경제체제 안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 수 있을지는 더욱 난해한 과제다. 우리가 ‘인류세’를 마주하는 것은 과학적이면서 인문학적인 과제다. 난제 중의 난제다. 이 대목에서 나는 인류세의 철학으로 인간중심적 세속적 휴머니즘으로부터 내성적(intrinsic)‧영적(spiritual)이면서 생태적 휴머니즘(eco-humanism)으로의 전향을 생각한다.

 

잠재적으로 가능한 인류세의 궤적은 두 갈레로 드러날 게다. 그 하나는 거침없이 가는 인류세의 궤적이다. 화석연료 사용이 좀체 줄어들지 않고 늘어나는 에너지 소비에 따라 생태계와 생물다양성이 점차로 붕괴될 게 뻔하다. 이것은 지구 생태계 구조가 전면적으로 균열되는 과정이다. 다른 하나의 궤적은 인간이 생물권의 필수적 물질을 재활용하는 방법을 강구하고, 저장하는 에너지와 소비하는 에너지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함으로써 지구시스템의 균열이 완화‧조정되게 하는 과정이다. 선택은 우리 자신의 몫이다. 인류세에서 전자는 경착륙이고 후자는 연착륙이라는 차이다. 하지만 그 차이는 엄청나다.

 

현재 인류가 생물권과 맺고 있는 관계는 호혜적이라기보다 ‘기생적’이다. 마치 거머리가 숙주의 피를 빨아들이듯이, 인간이라는 기생충이 생물권에서 계속 에너지를 대량으로 뽑아내고 있다. 우리가 자연과 호혜적인 관계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1인당 토지사용과 에너지자원 사용량을 상당부분 조정해야 한다. 이것은 물질문명의 주요 에너지원인 화석연료로부터 탈피하려는 노력과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식량생산을 위한 토지사용을 더욱 효율화하고, 가능하면 야생지(광합성의 보물창고)를 가축사료용 농지로 전환하는 걸 절제해야 한다. 이런 것은 원칙 차원에서 보면 간단하지만, 정치경제적 차원에서는 복잡한 난제다.

 

인류세가 우리에게 도전적인 이유는 지구행성 시스템에 미치는 변형의 규모와 미래의 지속 가능성에 심각한 위기(한계)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 시스템의 영향력이 전 지구적이고 거의 공시적으로 지구시스템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사 연구자인 맥닐(J. R. McNeill)은 인류세의 역사적 맥락을 『태양아래 새로운 것(Something New Under the Sun)』(2000)이랬다. 이 책은 국내에서 『20세기 환경의 역사』(2008)로 출간되었다. 맥닐은 20세기에 인간이 초래한 환경변화가 “제2차 세계대전, 공산주의 출현, 대중의 문자해득력 증가, 민주주의 확산, 여성해방 운동”과 같은 획기적 사건들의 중요성마저 왜소해 보이게 만들었다고 했다.

 

역사학자가 핵심적 분석대상으로 삼은 큼직한 역사적 사건을 능가하는 파급력을 지닌 환경변화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가속화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 종은 의도치 않게 지구에 대해 통제되지 않은 ‘거대한 실험’을 수행했다. 맥닐의 통찰이 비범한 이유는 환경 분야의 맥락에서 진즉에 ‘인류세 역사’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그는 인류 운명을 최종적으로 확정한 추세(인류세의 도래)를 이렇게 압축한다.

 

“20세기의 두 가지 거대한 추세, 즉 화석연료에 기반한 에너지체제로의 전환과 인구의 급격한 성장(20세기 초에 불과 15억이던 인구가 20세기 말에는 60억 이상으로 급증)이 전 세계적으로 나타났다. 이에 더해 세 번째 추세로 경제성장과 군비증강에 전념하는 추세가 공고화 되면서”(2024, p.213) 인류운명이 인류세로 결정되었다는 게다. 맥닐은 인류세의 단일 원인으로 자본세를 지목하거나 이산화탄소 배출만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인류세 역사가 새롭고 복잡한 ‘시스템적 딜레마’라고 주장한다.

 

인류세 역사는 역사학자들을 백지상태로 만들어서, 역사의 목적이 무엇이고 역사적 증거는 무엇이며, 엄청나게 혼란한 현실 속에서 어떻게 의미 있는 이야기 서술을 할 수 있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인류세의 역사적 특징은 전례 없이 새롭다는 점이다. 우리는 인류세를 살아본 적이 없다. 게다가 인류세 역사는 생태학보다는 ‘지구시스템과학’이라는 포괄적(유기체적) 과학에 기초한다.

 

견고하고 오래된 지구시스템에 최근 인간의 비대한 힘으로 파열이 생겼다는 새로운 인식, 그 힘의 속도와 강도, 그 연결성에 대한 총체적 관심이 결국 인류세 역사의 틀을 형성한다. 맥닐은 “인간 힘의 강도가 계속 높아지고 누적되면 마침내 거대한 전환을 초래하며, 지구시스템에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하기 마련이라고 보았다. 이 문턱을 넘어서면 지구시스템뿐만 아니라 인간세계에도 예측 불가능한 변화(재앙)가 발생한다. 인간사회도 자연계와 마찬가지로 잘 알려지지 않은 급전환점(tipping point)들이 있다.

 

인류세가 새로운 역사 분야라는 것은 전 지구적 규모의 차원을 중시한다는 것, 지구시스템과학에 주목하는 것과 더불어(그 위에) 인간성 자체를 새롭게 상상한다는 점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의 힘이 지구시스템에 균열을 초래했다면, 인간의 힘을 경이로우면서도 암울한 것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면, 우리 인간의 존재성과 삶 자체를 다시 반추해 보아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책에는 “우리가 누구이고 무엇을 바꿀 수 있고 바꿀 수 없는지, 무엇을 성취하고자 희망해야 하는지에 걸쳐 과거 인본주의적 개념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인류세’의 역사는 인간의 과거-현재-미래를 관통하는 기묘한 빛을 비추는 이상하고 새로운 프리즘이다.

 

유발 하라리는 “인간이 신(신화)을 만들음으로써 역사가 시작되었다면, 인간이 곧 신이 되고자 할 때 역사는 끝 날 것”이랬다. 인류 역사의 종착점이 인류세라면, 인간의 역사를 풍부하고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하고 정립 하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것이 바로 인류세 역사의 핵심적 질문이자 수수께끼다. 이 대목에서 나는 인류세의 첫 세대로서 나 자신의 존재성과 삶의 의미(가치)를 다시 반추해 보게 된다.

 

나는 해방둥이로 태어나 중학교 다닐 때까지 고향(시골)에서 전형적인 농촌생활을 했다. 내가 대학 다닐 때까지 만해도 우리나라는 가장 가난한 나라에 속했고 북한이 더 잘 살았다. 70년대 초반부터 우리나라는 산업사회로 이행하면서 고도경제성장을 유지했다. 이른바 유례없는 압축성장을 성취했다. 지금은 한국이 후기산업사회와 디지털 혁신 덕분에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선진국 반열에 들어 있다. 당대에 나는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나 지금은 가장 잘사는 나라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다. 급변의 세월을 살았다. 따라가기조차 버겁다.

 

내가 ‘인류세’에 본격적인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체감하게 된 것은 2019년 코로나환란 이후부터다. 그로부터 나는 ‘인류세’를 화두로 삼아 <기후생태 위기의 인문학> 쪽으로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그리고 나는 정년 무렵부터 지금까지 ‘대승기신론-중용-도마복음-동경대전’으로 이어지는 고전공부에 나름 지적인 관심을 보였다. 나는 인류세에 대응하는 삶의 양식으로 생태적․영성적 삶과 친해지고 싶다. 아직 영글지 못하지만 내게 생태-영성적(Eco-Spiritual) 삶은 내면적 나침반으로 작동하고 있다.

 

지성사와 탈식민주의 역사학자인 차크라바르티(D. Chakrabarty)는 「기후의 역사: 네 개의 테제(The climate of history: Four theses)」(2009)라는 논문에서 세계화, 지구 온난화, 자본주의, 기후변화의 과정이 동시에 수렴되는 현재의 상황이 무서울 정도로 새롭다고 했다. 그는 이제 “자연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를 가르던 오랜 인문학적 전통이 붕괴됐다. 계몽주의 이래로 자유를 논의했던 어느 시기에도 인간이 지질학적 행위자였다는 인식을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인류세 역사는 상충하는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야하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인류세 역사는 인간성을 새롭게 정립하면서, 인간이 더 이상 ‘자연 안’의 존재가 아니라, 집합적으로 지구시스템의 균열에 영향을 미치는 힘의 존재가 되었다고 본다. 인류세에서 우리 인간은 자연 안의 존재임과 동시에 지구의 행성적 힘이 된 ‘자연으로서의 인간’이 된 게다. 인류세에 인간존재는 “인간이면서 동시에 지질학적인 존재”이다. 인류세 역사에서는 인간의 힘이 지질학적이고 물리적인 힘의 원천임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존재의 정치적․윤리적 함의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책에는 인류세 역사는 네 측면에서 다른 시대의 역사와 구분된다고 했다. 그 첫째는 전례 없이 크고 새로운 곤경을 핵심적 주제로 다룬다는 점이다. 둘째는 거대한 규모와 시공간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점이다. 셋째는 지구시스템과학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넷째는 지금까지 우리 인간을 이해하던 개념과는 매우 다르게 행성적 힘으로서 ‘인간’ 존재를 다루면서 그것이 정치적 도덕적으로 어떤 함의를 가지는가를 고민해야한다는 점이다.

인류세는 하나의 주제라기보다는 새로운 질문을 제기하는 이론적인(역사철학적인) 렌즈인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 인간은 생태적 완충지대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완충지대가 없다. 인류세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기후 온난화의 영향, 깨끗한 물 부족, 생물다양성의 급격한 감소가 서로 연쇄적으로 엮이는 끔찍한 현실이다.

 

근대국가는 경제적 성장과 풍요를 집요하게 추구했다. 성장지상주의는 인류세를 촉발한 강력한 힘으로 작용했다. GDP로 측정되는 재화와 용역 산출량은 1960년에 1조 달러 남짓했으나, 2018년에 80조 달러를 훌쩍 넘어섰다. 세계적 GDP의 성장은 부유층의 과소비와 빈부격차를 심화했다. 우리는 매년 지구 두 개 분량에 해당하는 자원을 소비하는 가운데 점차로 생태학적 빚더미 속으로 가라앉고 있다.

 

<사이언스>(2015) 논문에 따르면, 인간이 안전하게 활동할 수 있는 공간범위를 규정하는 9개의 행성적 한계 가운데 이미 4개 영역이 무너졌단다. 즉 질소와 인에 의한 생화학적 순환, 생물권 온전성, 토지사용, 그리고 기후영역에서 안전경계를 이미 넘어섰다는 게다. 우리는 이미 ‘위험지대’에 발을 딛고 있다. 인류세에서 볼 때, 경제학은 ‘우울한 과학’이다. 경제학에 토대한 무한한 성장은 인류세 도래의 주범으로 작용했다.

 

책에는 생태시스템과 경제시스템을 재결합하는 두 가지 주요 방식으로 환경경제학과 생태경제학을 말한다. 환경경제학은 생물종과 생태계에 가격을 정하고 화폐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자연을 시장의 작동 안에 위치시킨다. 하지만 환경경제학은 근본적으로 신고전주의 경제학의 아류를 벗어나지 못한다. 환경경제학과는 달리 생태경제학의 기본 입장은 경제를 “유한한 전 지구적 시스템의 일부”로 이해한다. 생태경제학의 시각에서 볼 때, 지속 가능한 발전이나 녹색성장은 장기적 차원에서 모순에 불과하다.

 

생태경제학자들은 시장을 생태적 한계 안에 종속시키며, 자원사용과 분배에 대한 결정이 궁극적으로 기술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 문제로 인식한다. 진정한 인류세의 도래를 위해서는 기존의 근대적 ‘상자 밖에서’사고하는 열정이 있어야 한다. 지구시스템이 새로운 인류세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경제활동이 지구의 물리적 한계와 더불어 잠재적인 급전환점을 기민하게 알아차려야 한다. 지금은 전 지구적 수준에서부터 국지적인 지역수준에 이르기까지 어려운(탄력적) 정치철학적 숙의가 필요한 때다. GDP를 대체하는 새로운 기준으로 지속 가능한 경제후생지수, 진정한 진보 지수, 인간계발 지수, 지구행복도 지수 등이 심각히 고려되어야 한다.

 

생태경제학자들은 자연시스템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수용하고, 성장보다는 복지를 중시하고,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 평등과 공유경제를 우선한다. 그들은 정치경제를 재편함으로써 개인이 공평하게 지구의 지분을 공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정한 지구 지분’(far Earth share)에 따르면, 부유한 지구북부 나라들은 번영하는 공동체를 건설하되 내부적 불평등을 완화하고 소비과잉을 줄여야 한다. 훨씬 많은 인구를 부양하는 지구남부 나라들은 적절한 의식주를 공급하면서도 가능하면 환경 파괴를 줄이는 발전 경로를 택하도록 한다. 생태적 한계, 복지확충, 불평등의 완화가 생태경제학의 요지다.

 

정치경제적 측면에서 볼 때, 기후위기는 근원적으로 자본주의의 재앙이라는 입장이 지배적이다. 이송화일(2024)은  “기후위기는 단지 자연의 재앙이 아니라 가부장제와 인종주의와 함께 자본주의가 가져온 재앙”이랬다. 해서 기후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체제전환이라는 정치적 해법이 긴요하다는 게다. 개발과 성장에 목매는 자본주의를 포기하지 않는 한 기후생태 위기의 탈출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인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지질학적 주인공(행위자; agent)이 되었다. 『인류세의 철학』(2022)에서 저자는 지질학적 행위자로서 인간세계가 자기완결성을 완화하고 생태계와 만나는 지점을 “그 사이(in-between) 어딘가 에 있는 것, 모든 가능성이 한계 지워지지 않는 ‘중간’(middle)의 어딘가에 있는 것”이라 했다. 그곳은 인간세계가 자연계와 접하고 만나는 곳으로, 자연과 일체화되는 곳과는 다르다고 했다. 이 지점은 자연세계와 구별되면서도 인간세계의 자기완결성이 빠져나오는 곳이라 했다. 그 지점은 아직 막연하고 추상적이다.

 

인간의 궤적과 지구행성의 궤적이 무관하다는 착각이 가져온 예기치 않은 결과가 바로 ‘인류세’다. 인류세가 우리에게 제기하는 궁극적 질문은 어떤 제도와 정책, 기술을 채택할 것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어떤 세상에서 살고 싶어 하는가이다. 지구시스템이 우리의 선택에 제한을 주기도 하지만, 그 최종 결정은 지구시스템이 아닌 우리 자신의 몫이다. 나는 진정한 인류세(authentic anthropocene)로 ‘개벽세’(cosmic-opencene)를 고민한다.그 연장에서 개인적으로는 '생태-영성적' 삶의 체화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