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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의 철학: 기후 생태 위기 시대에 삶과 철학

평촌0505 2024. 8. 2. 10:44

인류세의 철학은 인간(인류)에 대한 도전적 철학이다. 나는 인류세 철학의 연장에서 혹은 그 대안으로 기후의 철학을 생각한다. 최근 이진경과 최유미 공저로 지구의 철학: 모면할 길 없는 기후위기 시대의 삶에 부침(2024)을 읽었다. 기후위기 시대에 인간의 철학은 지구의 철학으로까지 확장·전치되어야 할 게다. 저자는 지구의 철학이란 지구를 대상으로 하는 철학이 아니라 지구를 주어로 하는 철학이랬다. 지구를 주어로 삼는다지만, 기후위기 시대에 지구를 철학하는 것은 여전히 우리 인간이다. 일종의 형용모순이다.

 

책의 서론에서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 역사학 등 인간을 주어로 하는 이론과 개념 안에서, 지구를 주어로 (전치)하는 사유가 작동하도록 해야 한다. 그것들이 지구에 대해 말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에 의해 말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의미에서 지구의 철학은 지구에 의해 가동되는 유물론적 사유. 결국 지구의 철학이란 인간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 거대한 사물’(행성)로서의 지구에 의해, 인간을 주어로 하는 사유가 와해 되고 비틀리고 재가동하게 하는 것이다.

 

지구를 둘러싼 대기, , , 빙하, 바람, , 나무도 모두 그 나름 힘을 갖고 행동하는 주어다. 해서 인간 혹은 동물처럼 움직이는 것만이 행동이라 하는 것은 동물중심적 단견이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만이 주어라고 하는 것은 인간중심적인 고질병이랬다. 요즘 나는 가끔 소공원 숲길을 맨발로 걸으면서 오솔길 나무를 손으로 잡는다. 그리고 선 채로 나무와 하늘을 쳐다본다. 그 순간 나는 흙-나무-하늘과 하나로 교감한다. 이른바 자연과의 직거래하는 순간이다. 그 순간 몸과 마음이 편안하다.

 

지구는 인간이 하는 대로 받아 주고 되돌려준다. 되돌려줄 때 지구는 그저 수동적 대상이 아니라 능동적 주어다. 반응하는 능동적 주어다. 그렇게 반응할 때도 원한 없이 반응하고 복수심 없이 되돌려 주는 주어다. 인간의 역사는 지구에서 생존의 동맹자를 찾는 과정이었을 게다. 아마 지구에게 우리 인간은 끝내 실패한 동맹자로 기억될 것이다. 동맹자들을 일방적으로 이용하고 착취하다 그 성공에 취해 몰락해 간 종으로 기억될 터이다.

 

지구는 인간의 공격을 조용히 받아들이기만 하는 무감각한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소리치고 있었다. 다만 우리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고,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들려도 그냥 무시해 왔다. 그 소리의 주인(주어)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못했다. 저자는 지구가 대상 아닌 주어로 드러난 것은 인간들이 더는 어찌해 볼 수 없을 만큼 기후위기가 심각해진 사태를 통해서라고 했다. 이른바 인간이 더 이상 주체일 수 없다는 게 드러난 사태까지 온 게다. 해서 지구를 주어로 삼는 사유는 주체철학의 최종적 해체를 통해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는 게다.

 

저자는 모면할 가능성이 없는 파국적 기후위기 시대를 살아내기 위해서는 그 위기를 부정할 것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현실로 위기를 수긍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라고 묻는다. 그는 옳지만 실행될 리 없는 것을 재차 촉구하며 목소리의 톤을 올리기보다는, 모면할 수 없는 파국 속을 살아내기 위한 감각과 사유로 눈을 돌려야 한다. 지구의 철학이란 파국적 기후위기를 수긍하고 살아내기 위한 철학적 지도의 이름이랬다. 이런 지도를 그려보기 위해 이 책은 기필 된 것이다. 비장한 철학의 결단이다.

 

책에는 인류세란 인간들이 쫓아가는 빛에 의해 지표면에 드리워진 짙은 그늘이다. 자신들로 인해 만들어졌지만 자신들이 만드는 것도 자신들의 뜻대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닌 검은 그림자다. 인간들이 욕망하는 빛의 강도로 인해 지표면 아래 땅속으로까지 스며든 짙은 흔적이랬다. 지금의 기후위기가 흔히 이산화탄소의 밀도(비율)로 표상되긴 하지만 지질학적 변화에 따른 위기는 단지 이산화탄소 문제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해양과 대지, 대기, 심지어 지하의 토양과 광물까지 포함하는 거대한 격변이 맞물려 있다.

 

지리상의 발견을 통해 지구가 통합된 하나로 탄생함에 따라 그것을 영유하는 인간은 발견의 권리를 행사한 하얀 얼굴을 가진자들이다. 그들은 전체 인간을 표상하는 지위를 차지하고, 그 결과로 휴머니즘이 나왔다. 지구는 모든 인간적 활동의 절대적 외부다. 따라서 인류세’(Anthropocene)란 인간의 의지나 이성 바깥의 그 불가능성을 인간의 힘으로 지층에 새겼음을 뜻하는 역설적 개념이다. 저자는 기후위기란 인간이 그 지구 안에서 생존을 지속하려면 자신이 아는 것의 외부를 수긍하고 그것에 맞추어 삶이나 사고를 바꾸어야 한다는 지구의 경고랬다.

 

기후생태 위기 시대를 살아내기 위해 저자는 우리 인간이라는 지반을 떠나야 한다고 했다. “인간을 목적으로 하고, 인간을 자명한 준거로 삼기를 정지해야 한다. 인간 아닌 것들을 통해 인간에 대해, 인간이 만든 세상에 대해 사유해야 한다. 인간이란 지반 바깥에서 인간이란 이름으로 명명되는 시대에 대해 사유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인간 자신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이들과 동맹해야 한다. 어떤 존재도 특권화되지 않는 존재론적 평등성의 평면으로 내려가야한다는 게다. 이 대목에서 나는 조동일(2024)만인, 만생, 만물의 대등론을 떠올리게 된다.

 

인류세는 곧 자본세란다. 20세기 중반 이래 지구적 위기를 대대적으로 가속 시킨 또 하나의 분기점이 대량생산-대량소비를 내세운 자본의 힘이다. 위기로 귀착된 역사의 실제 추동력이 인간이 아닌 자본이라는 사실이 사태의 해결을 더욱 난감하게 한다. 저자는 모든 인간의 행동이나 사고를 돌려놓는 것보다 자본에 포섭된 인간들, 인간의 일부를 돌려놓는 것이 훨씬 어렵다고 했다. 위기의 가장 가까운 원인이 위기의 효과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 그게 위기의 심각함을 알아도 해결할 수 없게 하는 이유라는 게다. 오죽하면 자본주의 종말을 상상하느니 세상의 종말을 상상하는 게 더 쉽다.”는 말까지 나왔을까.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인류세’란 말은 승산 없는 이 전쟁에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목표를 표시하기에 딱 좋은 말이다. ‘자본세’ 또한 그러하다. 인간 없이 자본이 어찌 이 넓은 대지를 착취할 수 있었을 것이며, 자본 없이 인간이 이 거대한 생명의 역사를 어찌 인간의 이름으로 채색할 수 있었을 것인가. 인간과 자본은 생각보다 훨씬 가까이 있다. …(중략) 두 가지 거대한 속임수의 체제와 이어진 이 두 개의 말 모두, 승산 없고 가망 없어 보여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전쟁의 이름을 표시하기에 아주 좋은 말이니까 말이다.

 

지구의 철학에 따르면 인류세나 자본세나 모두 가망 없는 전쟁의 이름이다.

 

책에는 기후 특이점에 따른 멸종의 특이점과 여백을 다루고 있다. ‘특이점이 온다!’는 예언으로 요란하던 때가 있었다. 이 예언은 정보기술과 생명기술과 나노기술이 융합해 거대한 가속의 전망으로 얻어낸 것이다. 이 새로운 미래의 탄생지는 실리콘밸리였고, 중심적 성도는 실리콘밸리 기업가였다. 1950년대에 접어들며 사회경제적 동향뿐만 아니라 지구 시스템에도 거대한 가속이 일어난다. 여기 거대한 가속은 자원의 소모와 기후변화 그리고 사회경제적 변화 모두 하나의 특이점을 통과 했음을 의미한다.

 

동일한 거대한 가속임에도 과학기술의 특이점은 쉽게 수용되었지만, 기후변화에 대해서는 좀 더 복잡한 양상이다. 기후 문제는 독립성이 가정된 두세 개 변수의 변화를 통해서는 결코 포착될 수 없다. 게다가 기후변화는 그에 연관된 수많은 변수의 측정 불가능한 연쇄효과로 발생한다. 그 연쇄효과는 음의 되먹임을 통해 상태를 안정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는가 하면, 양의 되먹임을 통해 서로의 효과를 순환적으로 증폭시키기도 한다. 연쇄효과를 통해 가속화된 변화가 또 다른 종류의 순환적 연쇄를 끌어들일 때 티핑 포인트라는 또 다른 분기점이 예견된다. 그것은 거대한 가속의 어느 지점에선가 또 한 번의 비약이 될 특이점을 예비한다.

 

산업혁명이 시작된 1750년대에 이산화탄소 농도가 280ppm에 불과했으나, 현재 이산화탄소 농도는 420ppm을 넘어서고 있다. 이산화탄소 농도 임계치는 450ppm을 넘지 말아야 한다. 대기의 온난화와 해양 산성화, 부영양화에 따른 산소 부족은 흔히 대멸종으로 이어지는 죽음의 3인조라고 한다. 세 가지 모두가 되먹임됨에 따라 지구의 상태가 지금과 아주 다르게 꺽어지는 티핑 포인트가 예상보다 빨리 도래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에게 기후위기는 어느 하나에서 오는 게 아니라 여러 방향에서 연쇄된 변인들이 얽혀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책에는 이런 양상으로 나타나는 사태를 지구 한계라는 개념으로 요약한다. 이에 따르면 질소와 인(비료)에 의한 토양과 해양의 오염문제, 그리고 생물들의 멸종 심각성은 온난화로 요약되는 문제보다 더 절박하다는 게다. 이는 경작과 목축 중심으로 진행되는 토지이용 방식의 문제가 알려진 것보다 심각하다는 의미다. 멸종율의 증가는 물론, 비료와 농약, 메탄가스와 이산화탄소의 증가 또한 이와 연관되어 있다. 현재 상태는 지금처럼 계속된다면인간조차 생존하기 힘든 상황으로 이어진다. 파국으로 치닫는 지구적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탄소 배출량을 최대한 빨리 줄이는 것을 말하지만, 지금의 탄소 기반 문명안에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생산-유통-소비에 이르는 모든 경제활동이 여전히 탄소를 동력으로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탁월한 기술은 사람들을 탁월하게 불러들이고 탄소를 탁월하게 배출한다. 요컨대 탁월한 기술은 탁월한 에너지 소모 기술이다.

 

사실 기후 문제는 지구적이어서 기술 개발을 선도할 경제적 능력이 있는 국가나 기업에서 그런 기술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는 출구 특이점으로 방향을 틀 수가 없다. 여전히 기술은 자본 없이 개발되기 어렵고, 자본주의적 이윤 없이는 지속하지 못한다. 자본주의에서 지속 가능한 기술이란 자본에 포섭된 기술뿐이다. 저자는 이윤 없는 기술은 없다. 이런 기술이 경제 논리 자체를 등진 기후위기를 해결해 주리라는 약속은 돈을 지불할 생각 없이 발행하는 부도수표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아마도 우리는 멸종으로 귀착될 파국을 면하기 어려울 것 같단다. 이른바 여섯 번째의 대멸종이 인간 자신의 멸종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게다. 그것은 분명 인간 세계의 종말로 이어질 것이지만, 결코 지구의 종말은 아니다. 또 생명의 종말도 아닐 터이다. 다른 생명체들이 진화의 역사를 시작할 문턱일 것이다. 그것은 단절을 통해 구도를 바꾸는 역사적 비약의 문턱이다.

 

재난 연구자들은 지구적 파국 위험이라는 특별위험 등급을 전 세계 인구의 10% 정도가 죽는 사태로 규정한다. 따라서 종 전체가 단기간에 절멸하는 식의 극적인 종말은 오지 않을 게다. 아마 지루한 고통을 견디어 내는 장기적 지속의 종말이 될 것이다. 저자는 멸종이나 종말은 모든 개체의 멸절로 규정되는 어떤 사태가 아니라, 그 개체들의 삶이 겪는 극한값이랬다. 출구 특이점을 만들지 못하는 한 우리는 종말이라는 극한값을 향해 다가갈 수밖에 없다. 끝내 포기되지 않을 것 같은 성장이나 발전은 그 극한값을 향한 가속페달이다.

 

해서 종말이란 습관적 희망, 관성적 사고가 이제까지 제시해온 모든 답들의 무효성을 뜻한다. 그것은 탄소배출 감소처럼 알아도 실현될 수 없는 답, 탈성장처럼 실현하려 해도 지구적 차원에서 소용없을 답, 기술주의적 해결처럼 함수적 단순성에 갇힌 허황된 답, 그린 뉴딜처럼 그 추세를 가속 시킬 수 있는 뒤집힌 답 등의 무효성이다. 인간은 생산과 개발이라는 명분으로 살의 없는 살상을 자행해 왔다.

 

밀이나 옥수수 같은 인간을 위한 작물이 육지 면적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전에 거기에 있던 수많은 식물의 생존을 파괴했다는 걸 의미한다. 개체들의 서식지를 파괴해 수 많은 개체군들을 죽이는 대량 살상이 자행된 게다. 대멸종은 지구적 스케일에서 자행된 대대적 살상 없이는, 생존지대 자체를 제거하는 포괄적(global) 살상이 아니면 일어나기 어려운 사태다.

 

이 지점에서 대멸종의 이유는 기후위기의 이유와 다르지 않음이 분명해진다. 산업혁명을 통한 기술적 비약과 결합된 경제적 동력이 대량생산-대량소비의 비약을 초래했을 때, 대멸종 또한 대량개발-대량멸종의 사태로 비약했을 것이다. 경제적 팽창의 비약적 특이점이 있었던 시기에 기술 혁신의 특이점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 시기에 생명체 멸종 속도가 비약하는 특이점이 있었다. 그 연장에서 기후변화가 티핑 포인트를 넘는 지점에서 또 하나의 특이점이 형성된다.

 

책에는 이미 지질학적 시간 속에서 종말을 향해 나아가는 그 곡선의 추세를 바꿀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죽어간 것들을 살려낼 길도 없고, 인류가 서식지를 잃은 것들에게 땅을 되돌려주며 생존의 길을 열어줄 가능성도 없기 때문이다. 결국 기후 위기의 징후로 우리가 겪는 고통은 해를 거듭할수록 피할 수 없는 재앙이 될 터이다. 개인의 경우에도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이 출구 없는 삶이다.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삶을 견디고 지속해야 한다는 사실은 가혹하다. 따라서 종말이 정말 올 것인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떤 종말인가이다. , 어떤 종말을 살아 낼 것인가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멸종의 시간을 어떻게 사는가에 따라, 멸종의 여백에서 무엇을 하는가에 따라, 멸종의 과정을 좀 더 쉽게 통과하게 될 것이고, 어쩌면 멸종 곡선에 약간의 변형을 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멸종을 줄여 곡선의 기울기를 부분적으로 완화 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추세를 결코 바꾸지는 못하겠지만, 혹시라도 전체적인 기울기를 조금이나마 완화 시킬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멸종의 폭을 줄이고 종말의 구멍을 약간이라도 확대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우리가 종말을 사는 가장 그럴듯한 길이 될 것이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지구의 역사에서 인류세라는 이름을 붙인 인간이 뒤늦게나마 지구 역사를 좋은 쪽으로 바꾸어 놓는 주체적 노릇을 했다는 위안을 얼마간 받을 수 있을 게다.

 

책에는 종말은 종결이 아니라 물음이랬다. 그것은 속 편한 가정들이 제공하는 모든 출구가 침수되는 심연이면서, 결코 풀릴 것 같지 않은 물음과 문제가 탄생하는 대지의 어둠이랬다. 유물론자에게 종말의 불가피성이란, 황무지를 수긍하고 거기서 살아가는 길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출구 없는 세계에서 출구를 찾아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종말론은 출구가 있는 종말론이었다. 구원의 약속을 위한 배경으로서의 종말론, 거기에는 종말이 없다. 약속된 구원의 출구가 있다면 그게 어찌 종말인가! 저자는 어떻게 해도 모면할 수 없는 종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구멍은 있어도 구원은 없는 종말을 말해야 한다는 게다. 말하자면 종말의 문제를 허무주의라는 비난으로 밀쳐내지 말고 진지하게 사유하자는 게다. 이렇게 질문해 보자.

 

근거 없는 희망과 근거 있는 절망이 있을 때, 그래도 우리의 선택지는 희망이어야 하는가? 기후 문제가 이렇게 심각해진 것은 우리가 근거 없는 희망으로 가던 길을 계속 갔기 때문이 아닌가? 근거가 있어도 절망할 줄 모른다는 것이야말로 출구가 없는 종말이 아닌가?

 

종말에 대한 집단적 공포는 죽음에 대한 개체의 공포와 상통한다. 종말에 대한 강박증적 부정은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감정의 히스테리적 반응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누구든 반드시 죽는다는 걸 안다. 죽음을 긍정하면 어떻게 살 것인지를 차분히 생각한다.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지 숙고하게 될 것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남은 생을 어떻게 보내는 게 현명한지 반추하게 될 것이다. 종말을 수긍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가 어떻게 죽어가고무엇을 남기는가에 따라 살아남은 생명체들은 다른 조건에서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휴머니즘이야말로 인간으로서 벗어던지기 어려운 굴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과 공생이나 동맹을 말할 때조차 인간을 새로운 중심으로 삼으려는 태도를 벗어나야 한다. 인간 자신을 인간 아닌 것들과 연관해 사유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인간(만인)을 만물-만생과 공동체로 연기(緣起)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체는 60개 조에 이르는 세포들의 거대한 군체(colony). 게다가 그 수보다 많은 미생물이 사는 서식지다. ‘는 그 세포나 유전자 수 이상으로 많은 미시적 영혼들의 의사를 그때마다 하나로 바꾸어 움직이는 거대한 공동체다. 죽음의 긍정은 삶의 부정이 아니라 죽음마저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최대치의 긍정이다.

 

다세포생물인 우리 몸의 생은 때가 되면 죽어 주는 세포들의 지혜 덕분이다. 저자는 때가 되면 죽음을 받아들일 줄 아는 세포의 발전소인 미토콘드리아의 지혜가 생물학적인 연속성을 갖는다는 게 퍽 의미심장하다고 했다. 세포 이하의 미시적 영역에서 작동하는,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거대한 미시적 지혜는 어쩌면 생명의 역사에서 철학이 처음 탄생한 순간을 증언해 주는 것이다. 죽음의 긍정이란 소멸이 곧 탄생인 생성에 대한 긍정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죽음의 긍정, 종말의 긍정은 모든 걸 부정하는 허무주의가 아니라 긍정적일 수 있다면 어떤 사소한 것도 긍정할 수 있는 이중의 ‘긍정철학’을 낳는다. 이런 철학을 가진 영혼은 파국을 저지하기 위해 제안되는 답들이 그 자체로는 답이 되지 못함을 알면서도, 그 답들 속에서 가능한 한 동맹자를 찾고 그와 접속할 지점을 발견하려 할 것이다. ‘나’나 ‘우리’는 빠져나가지 못해도 누군가 빠져나갈 수 있는 이들이 늘어난다면, 그 구멍을 찾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려 할 것이다. 죽음의 긍정은 그저 눈앞의 목적지만 보고 치달리는 삶에서는 보지 못하고 생각지 못했던 것을 향해 시선을 돌리게 할 것이다.

 

죽음마저 긍정하는 이중의 긍정 철학에서는 출구를 찾으려는 시도와 과정에서 종말을 사는 나름의 방법으로 모든 것을 수용한다. 이른바 멸종의 여백을 늘리는 방법들이다. 그것은 함께 사는 길을 향한 열린 마음이다. 죽음을 수긍한 사람은 자신이 남길 유산 속에서 스스로 남은 삶을 본다. 어떻게 남은 삶을 살 것인지, 이후 살아갈 것들 속에 무엇이 되어 남을 것인지를 숙고한다. 저자는 자신의 죽음마저 자기 바깥의 생명 속에서 수긍하는 미토콘드리아의 죽음 철학을 말했다. 이것은 내 안에 흘러넘치는 수많은 타자들을 따라, 나를 넘어선 거대한 타자들의 흐름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랬다.

 

책에는 기후생태 위기에 대응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최선을 이유로 세상에 대해 분노하고 자신을 정당화하는 최선(지순)의 도덕이 아니라, ‘적절성(adequacy)의 윤리를 말한다. 이 윤리는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도덕적 정언명령에 대해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마세요라는 윤리적 권고다. 말하자면 멸종이나 종말의 무게로 자신을 너무 몰아세우지 말고, 기후에도 좋고 자신에게도 좋은 포용적 중도의 길을 찾으라는 게다. 본래 중도쌍차쌍조’(雙遮雙照).

 

죽음을 긍정하는 것은 죽음에 삶을 바치는 것이 아니다. 목숨을 걸고 무언가를 향해 달려가는 것도 아니다. 죽음의 긍정이란 죽음에 이를 때까지 평온하게 삶을 밀고 가는 여유다. 도래할 죽음을 향해 가벼움의 감응으로 웃으면서, 그 웃음으로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유물론자는 어차피 도래할 종말을 수긍하면서, 그래도 좋은 삶을 만들기를 끝내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다.

 

저자는 모면할 길 없는 지구적 스케일의 종말 앞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종말까지 웃음으로 긍정하는 이런 유머 감각이 아닐까?”라면서 책을 마무리한다. 때로는 강박적인 당위보다 포용과 유머가 더 강인하다. 휘어질망정 부러지지 말랬다. 기후생태 위기는 장기적이고 복합적인 난제이기에 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