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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문학: <소년이 온다>

평촌0505 2024. 10. 16. 13:15

작가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한국 문학이, 한국문화와 역사가 세계의 주목을 받은 쾌거다. 경제적 선진국에서 문화적 선진국으로 가는 길을 활짝 열었다. 나는 지금까지 한강의 작품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원래 소설은 잘 읽지 않는 편이다. 늦었지만 <소년이 온다>는 소설을 e-북으로 읽었다. 이어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있지만 잘 내려가지 않는다. 한강의 소설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상징적이고 시적 산문으로 압축된 글이다.

 

문학평론가 김명인 교수는 한강의 노벨문학상은 한국 근현대 문학의 풍요로운 토대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고 했다. 한국 문학의 풍요성이란 식민지-전쟁-분단-냉전-군사 독재-압축성장-민주화-극한 신자유주의의 관통, 게다가 완강한 가부장주의라는 역설적인 것들이 문학적 풍요성을 제공했다는 게다. 그는 그보다 작가적 경륜이 앞서는 원로 남성 거장 황석영이 있는데, 왜 그보다 젊은 여성 작가 한강에게 먼저 이 상이 돌아갔을까?”라고 묻는다. 황석영은 정통 리얼리즘 작가지만, 한강의 소설은 질문이 무성하나 대답은 없다고 했다. 이것은 탈근대 혹은 후기 근대적 글쓰기의 전형이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작별하지 않는다>에 반영된 초현실적 비의와 주술성은 근대 합리성의 폭력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자 지혜라는 게다. <소년이 온다>는 작가인 아버지 한승원을 빼고는 기필 될 수 없었을 게다. 교사 신분으로 일하던 아버지가 광주에서 가져온 사진집과 비디오테이프가 결국 한강을 역사적 트라우마와 보이지 않는 규칙에 맞서려는 증언 문학으로까지 떠밀어 넣은 게다. <소년이 온다> 에필로그에 이렇게 쓰여 있다.

 

“마지막 장까지 책장을 넘겨, 총검으로 깊게 내리그어 으깨어진 여자애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을 기억한다. 거기 있는지도 미처 모르고 있었던 내 안의 연한 부분이 소리 없이 깨졌다.” 한강은 이 작품을 쓰면서 스스로 변형되었고, 그 소설을 쓰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고 했다. 이처럼 그의 소설은 한국 현대사를 할퀸 공동체의 상처에 응답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작가는 이 소설을 쓰며 거의 매일 울었단다.

 

5.18 광주를 생각하면 나는 부채감에서 헤어나기 어렵다. 그때 나는 개인적으로 학위논문 쓰기에 여념이 없었다. 광주사태의 실상은 1981년 여름 내가 미국에 객원 연구교수로 머무는 동안 겨우 알아차렸다. 그러고도 나는 내 앞 가름하기에 바빴다. 역사의식이 철저하지 못했던 탓이다.

 

<소년이 온다>에서 주인공 소년이 이해할 수 없었던 한 가지 일을 소설에 이렇게 적고 있다.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모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 놓는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현실 모순의 극치를 보여준다. 굴절된 역사는 아직도 청산되지 않고 있다.

 

소설에는 네가 죽은 뒤에 장례식을 치루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고 했다.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알았지만, 다만 이상한 건 그 힘보다 강렬한 무엇인 양심이 압도했다는 걸 실토한다. 해서 세상에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이렇게 소설은 마무리된다. 내게 한강의 소설은 여전히 쉽게 읽히지 않는다. 아마도 그놈의 양심과 부채감 때문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