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연초에 제자들과 대만여행을 갔다. 일정 중에 음력 정월에 하늘에 연을 띄워 보내는 게 있었다. 연을 띄워 보내기 전에 자기가 원하는 소원을 연에 쓰게했다. 거기에 나는 ‘天地人 三合’이라고 붓으로 썼다. <중용> 1장 후반에는 ‘중화’(中和)라는 말을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희로애락이 아직 발현되지 않은 상태를 중(中)이라 일컫고, 그것이 발현되어 상황의 절도에 들어맞는 것을 화(和)라 일컫는다. 중(中)이라는 것은 천하의 큰 근본(天下之大本)이요, 화(和)라는 것은 천하 사람들이 달성해야 할 길(天下之達道)이다. 중(中)과 화(和)를 지극한 경지에까지 밀고 나가면, 천지(天地)가 바르게 자리 잡을 수 있고, 그 사이에 있는 만물(萬物)이 잘 자라게 된다.」
위에서 ‘중’(中)은 희로애락이 아직 발현되지 않은 미발의 기준으로 천하의 큰 근본(大本)이다. ‘화’(和)는 희로애락의 감정이 발현되어 상황의 절도에 들어맞는 것으로, 모든 사람들이 달성해야 할 길이다. 해서 ‘중화’(中和)가 지극한 경지에 이르면 하늘과 땅이 제자리를 잡을 수 있어, 천지간에 존재하는 만물이 잘 자라게 된다는 게다.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만물 가운데 가장 영특한 존재가 인간이다. 그래서 ‘천지인’(天地人)의 삼합을 말하는 게다.
근데 천지간에 만물과 더불어 존재하는 인간의 힘이 너무 비대해져 하늘과 땅이 바르게 자리를 잡을 수 없고, 만물이 고루 잘 자라나지 못하게 되니 문제다. 인간에 의해 지구시스템에 균열을 일으킴으로써, 이른바 ‘인류세’(Anthropocene)를 초래했다. 이것은 인간에 의한 천명(天命)의 반역이다. <중용> 첫 머리에는 “하늘이 명령하는 것이 이른바 본래성이고(天命之謂性), 이 본래성에 따르는 게 곧 사람이 가야할 길(率性之謂道)”이랬다.
인간의 ‘본래성’(즉, 本然之性)은 하늘의 지엄한 명령에 의해 모든 인간에게 품부되어 있다. 그럼에도 우리 인간은 물질문명의 노예가 된 나머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본래성을 잃어버린 게다. 본래성이 엉뚱한데 마실 나간 게다. 맹자가 지적한대로 사람들은 집에서 기르던 개가 집에 오지 않으면 온 동네로 찾아 나서지만, 자기 안의 본래성을 잃어버리고도 그런 줄을 모르고 사는 한심한 존재가 되어버린 게다. 예로부터 실성(失性)한 사람은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다. 사람다움은 곧 본성회복에 다름 아니다.
지금은 인간의 비대해진 힘(방만한 문명의 힘)에 의해 ‘천지인’ 삼합에 균열이 일어나고 있다. 그 균열이 가져온 재앙이 ‘기후위기’다. 기후변화를 넘어 지금은 기후위기다. 그 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바로 인간에 의한 지구온난화 때문이다. 20세기이후 인간이 지구에 가하는 충격은 선형이 아니라 기하급수적이자 함수적이다. 1900년에 약 450억 톤이던 누적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2000년에는 1조 톤으로 껑충 뛰었고, 지금은 무려 1조9000억 톤으로 치솟았다.
인간이 화석연료를 동력 삼아 지구에 가한 압박은 ‘하키스틱’ 심지어 ‘큰 낫’ 모양의 그래프를 보이며 급증했다. 온실가스 배출량, 비료소비량, 물 사용량, 해양 어획량, 육지생물권 파괴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가속화’가 일어나고 있다. 지구온난화 속도가 산업혁명 이후 시속 100킬로에서 2,000키로 이상으로 질주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만큼 공멸의 파국으로 가는 속도가 빠르다는 게다. 그럼에도 우리 대부분은 태평하다. 왜 그런가?
아마 두 가지 이유 때문일 게다. 하나는 우리 인간이 이미 과학혁신에 따른 물질세계의 세례를 듬뿍 받아 물질적 풍요와 편리함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편한 쪽으로 길들여지면 계속 그쪽으로 빠져들기 십상이다. 관행과 습관이 운명을 바꾼다. 다른 하나는 ‘천지인’ 삼합에 대한 안일한 믿음 혹은 자기 합리화 때문이다. 천지의 운행은 그 순환에 어김이 없기 때문에 기후변화라는 게 일시적 우발적 변화에 불과하다는 쪽으로 무시하려는 일종의 자기기만에 빠진 게다.
노자는 되돌아보는 게 도(道)의 움직임(反者, 道之動)이랬다. 지금 우리 인간은 ‘천지인’ 삼합의 안정된 유지를 위해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우리는 너무 많은 물질소비를 하면서 끊임없이 쓰레기를 배출한다. 에너지 과잉소비가 일상화 되어 있다. ‘천지인’ 삼합에 균열이 오면 그 균열을 일으킨 당사자인 인류는 파멸할지라도, 천지의 운행은 변함이 없다.
해서 인류세에 기존의 휴머니즘은 설 자리가 없다. 이런 맥락에서 길희성 교수는 세속적 휴머니즘에서 영적 휴머니즘으로의 전환을 말했다. 결국 80억 인류의 생태적․영성적 삶의 회복만이 ‘천지인’ 삼합이 화육(化育)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