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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안의 공덕: 어찌 지켜낼 건가?

평촌0505 2025. 3. 11. 09:42

 

마음 안의 공덕은 내 안의 영적·정신 세계의 상승을 유지하는 삶이다. 마음 안의 공덕은 영성적 성장을 위한 것이기에 그 끝이 없다. 그리고 그 공덕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지난하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숙제다. 마음 안의 공덕은 사람다움의 과정(becoming/process)에 내재한다. 나는 요즘 이래저래 마음의 안정을 유지하기 어렵다. 우선 내 마음이 편치 않고 흔들린다. 뭔가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다. 게다가 가정에서는 아내의 불평이 늘어난다. 밖에서는 <지식과 세상> 조합 운영에 어려움이 있다. 나이 들면서 스스로 이래저래 심신의 한계를 체감한다.

 

이런 때일수록 하늘이 내게 품부한 본래성을 회복해 평상심을 유지하는 게 긴요하다는 생각이다. 지금은 내가 누구로부터 칭찬받거나 비난받을까 봐 신경 쓰지 않아도 좋을 나이다. 그냥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처럼, 코뿔소의 외뿔처럼 혼자서 갈 일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외부의 소리에 놀라거나 흔들리고, 그물에 걸려들지나 않을까 때로 걱정이다. 그리고 진흙에 발 담그기 싫다. 그러면서 연꽃은 좋아한다. 아직은 혼자서 시간을 잘 보내는 편이지만, 마누라 없이 혼자 사는 게 막막하다. 걱정이 팔자다.

 

내 딴에는 마음 안의 공덕을 지향한다지만, 여전히 그 깨침이 영글지 못하다. 그러니 생멸하는 마음에 끌려다니는 중생 신세를 면치 못한다. <대승기신론>은 중생이 곧 부처랬다. 모든 중생은 여래의 씨앗을 내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내 마음은 외부의 자극에 따라 부단히 생멸한다. 본래 마음은 변하는 것이 아니지만 바람 따라 물결이 이는 것과 같다. 물결이 일어도 물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물은 물이다. 내 본연의 성(本然之性)은 변함이 없건만 탐진치의 물결에 휘둘린다. 거울에 때와 먼지가 끼어 거울이 제구실을 못 한다.

 

어찌해야 할까? 길은 두 가지다. 하나는 본래성을 흔들림 없이 지켜내는 일이다. 이른바 수심(守心)이다. 다른 하나는 탐진치를 떠나 계정혜(戒定慧)로 입문하는 것이다. 이른바 지관쌍수’(止觀雙修) 혹은 정혜쌍수(定慧雙修). ‘멈춤살핌의 지혜가 긴요하다.

 

지눌(智訥; 1158-1210))<근수정혜결사문(勤修定慧結社文)>에서 땅에 걸려 넘어진 사람은 땅을 디디고 일어설 수밖에 없다.”고 했다. 여기 땅에 걸려 넘어진 사람은 생멸하는 마음(상념)에 걸려 괴로움()을 면치 못하는 나 같은 중생이다.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고통을 딛고 일어설 수밖에 없다는 게다. 생멸하는 마음(상념)을 디디고 참으로 그러한 진여(眞如, 이른바 본래성)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상념을 떠나 진여로 돌아간다는 게 무엇이며,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 이 대목에서 <대승기신론>일심이문’(一心二門)을 떠올리게 된다. 기신론에서 본래 마음은 하나이지만 마음의 양상은 생멸하는 마음이 드나드는 문(心生滅門)과 참으로 그러한 진여의 문(心眞如門)이 서로 다르면서 뗄 수 없는 하나의 총체로 맞붙어 있다는 게다. 따라서 이문불상리(二門不相離)이자 불이문(不二門 )이랬다. 여기 이문(二門)은 개념상의 구분이고, 실제로는 하나라는 게다.

 

땅에 걸려 넘어진 사람은 그 땅을 디디고 일어설 수밖에 없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참으로 그러한 진여(하나인 마음)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부단히 생멸하는 그 마음을 디디고 설 수밖에 없다는 게다. 이것은 일종의 형용모순이다. 기신론에는 말로써 말을 없애는 인언유언’(因言遺言)으로 진여를 말한다.

 

우리는 생멸하는 마음의 작용과 더불어 삶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음에도, 그것으로부터 벗어 나는 진여로부터의 초대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받고 있다. 그 초대를 외면하지 않고 꾸준히 내면화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진여와 하나가 되는 길을 간다. 우리가 삶의 과정에서 마음 안의 공덕을 지켜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부단히 생멸하는 마음을 디디고 택선고집(擇善固執)하는 삶을 지켜내는 것이다. 이른바 내 삶이 진선미성(眞善美聖)의 세계로 몰입하는 과정일 터이다. 길은 닦아야 길이 된다.

 

그것을 완전히 체현(體現)한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다만 거기에 입문하고자 부단히 수행(修行)하는 과정에서 마음 안의 공덕은 내 삶에 작동할 뿐이다. <중용>에는 이미 성()해 있는 것은 하늘의 도이고(誠者, 天之道也), 성실해지고자 노력하는 것은 사람의 길(誠之者, 人之道也)이랬다. 지눌은 <수심결>에서 밖에서 구하지 말고, 죽을 때 빈손으로 가지 말랬다. 살아서 마음 안의 공덕을 빡세기 수행(修行)하라는 게다. 나이 들수록 삶의 깊이를 가늠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