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때 맨발로 뛰어노는 게 일수였다. 맨발로 낙동강 모래사장을 걸으면 발바닥이 따끈했다. 발바닥으로 느끼는 고향의 추억이 아련하다. 초등학교 운동회 때는 운동장에서 맨발로 달렸다. 내가 달리기를 잘해 선수로 뽑히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비교적 다리가 튼튼한 편이다. 하지만 80줄에 드니 걸음도 더뎌지고 힘이 빠진다. 나이 탓이기도 하지만, 내 생활 습관과도 무관하지 않을 터이다. 나는 읽고 쓰기를 하는 동안은 의자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다. 의자의 배신이라는 말이 있다. 의자에 너무 오래 앉아 있지 말아야 한다.
그래도 내 몸의 DNA에는 수렵 시대 이래로 맨발로 뛰어노는 게 내축 되어 있을 게다. 이즘은 컴퓨터 자판기 앞에서 오래 앉아 있지 않는다. 특별히 바쁜 일도 없지만, 가능하면 작업을 짧게 끊어서 한다. 집안에서도 왔다 갔다 하거나 가벼운 산책을 하루에 두서너 번은 한다. 근데 요즘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자꾸 눞고 싶다. 올해 들어 이런 변화가 감지된다. 그래도 잠시 누워 있다가 다시 일어나 하던 일을 계속하려고 노력한다.
나는 작년 늦여름부터 가을까지 아파트 옆 소공원 숲길 따라 맨발로 걷기를 조금씩 했다. 그러고는 올해 들어 6월 중순이 지나도록 맨발로 걷기를 하지 않았다. 아침에 산책 때 소공원에 나가면 가끔 사람들이 맨발로 걷는 게 눈에 띈다. 게 중에는 작년에 걷던 사람도 보인다. 집사람은 내가 맨발 걷기를 하면 좀 별나다는 눈치를 보낸다. 대구 토박이라서 그런지 모르겠다.
이래저래 맨발로 걷기를 중단했다가 어제(하지) 내린 비로 땅이 촉촉한 걸 보고, 나는 맘을 내어 오전 한가한 시간에 소공원 숲길로 나갔다. 혼자 예의 그 숲속 오솔길을 천천히 맨발로 걸었다. 촉촉한 땅의 촉감이 좋았다. 가끔 나무 둥치에 손을 뻗어 위를 쳐다보니 땅과 나무와 내가 하나로 통하는 듯했다. 이른바 자연과 직거래하는 순간이다. 이럴 때 내 몸과 맘이 편안해진다. 동학에서는 한울님 모심(侍天主)을 안으로 신령함이 있고(內有神靈), 밖으로 자연의 기운과 통하는 것(外有氣化)이랬다.
이제 내 나름의 방식으로 맨발로 땅을 밟으면서 천천히 걷기를 다시 시작할 참이다. 그러는 동안 내 몸과 맘을 평온하게 유지하고 싶다. 나는 맨발로 땅을 밟는 동안이라도 천지인(天地人) 삼합을 소소하게 체현하고 싶다.
해월 최시형 선생은 사람만이 한울님을 모시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만물이 다 한울님을 모시고 있으므로 ‘물물천(物物天) 사사천(事事天)’이랬다. 내게 맨발로 땅 밟기는 ‘물물천 사사천’으로 통하는 하나의 방편(통로)이었으면 싶다. 오늘날 기후생태 위기는 곧 영적 위기이기도 하다. 인류세에 어머니 지구의 아픔을 목도 하면서 영적 생태학(spiritual ecology) 발현이 긴요하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