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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사람: 자연친화적 삶, 그리고 안전

평촌0505 2018. 12. 11. 10:41

 

  본래 우리 인간은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왔다. 약 1만 2천 년 전부터 땅을 경작해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인류는 오랜 동안의 수렵생활을 끝내고 정주생활로 바뀌게 되었다. 농업시대만 해도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 자연이 주는 혜택에 의존하면서 전형적인 자연친화적 삶을 영위해 왔다. 하지만 산업혁명이래로 인간은 종래의 농업중심에서 공업문명으로 급속히 전환하였다. 산업문명은 농업문명에 비해 우리들에게 물질적으로 엄청난 부와 편익을 제공해 주었지만, 날이 갈수록 심각한 자연훼손과 환경공해를 안겨 주었다. 발전은 자연과 사람 간의 신비로운 균형을 인위적(공업 기술적)으로 파손하기에 이른다.

 

마침내 산업발전은 지속가능한 인류문명의 붕괴를 위협하는 지경에까지 왔다. 현대는 언필칭 ‘초불확실성’ 시대이자 예측하기 어려운 ‘위험사회’가 되어 버렸다. 현대인은 하루 24시간 내내 위험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불안이 일상화된 시대다. 어찌할 건가? 문명의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 자연친화적이고 지속가능한 삶의 형식을 다시 체현하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이다.

 

본 발제는 오늘 우리네 삶에서 추구되는 안전의 개념을 전통적으로 동양철학이 추구해온 자연과 사람에 대한 관점에로 복원해 보고자 한다. 우리네 삶의 안전과 평온(안정)은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철학과 불교의 연기(緣起)사상에 진적에 잘 반영되어 있다. 다만 오늘 우리가 그것을 ‘온고지신’(溫故知新)하지 못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 이런 개념적 기준에 기반 해서 안전의 실제적 문제를 (1) 지속가능한 자연친화적 삶의 형식과 안전, 그리고 (2) 지구 구하기의 생각과 그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논의해 보고자 한다.

 

1. 동양철학에서 본 자연과 사람

 

자연과 사람간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성은 동양철학 중에서도 노자사상과 불교의 연기(緣起)사상에 가장 잘 녹아 있다. 임어당(林語堂)은 “동양문헌 가운데 어느 책보다도 먼저 읽어야 할 책이 바로 노자의 『도덕경』”이라 했다. 실제로 서양인들에게 가장 많이 읽혀지고 있는 동양고전으로 노자 『도덕경』이 꼽힌다.

 

노자사상은 동양사상사에서 하나의 기축을 형성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 이래로 유․불․도/선(儒․佛․道/仙) 삼교(三敎)가 하나의 현묘한 도(道)를 형성한 전통을 뚜렷이 지니고 있다. 유가(儒家)와 도가(道家)는 상호비판을 주고받는 가운데 동양사상을 풍부하게 발전시키는 두 축이 되었다. 또 인도에서 유입된 불교는 노장(老莊)사상의 바탕 위에서 동아시아 불교의 정착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런 불교의 옷을 입고 12〜13 세기에 신유학으로 성리학(性理學)이 대두하였다. 이런 일련의 사상사적 전개 과정에서 노장사상은 우리 몸속의 핏줄처럼 이런저런 모습으로 녹아들었다.

 

노자는 “도는 텅 비어(道沖)” 있어서 아무리 퍼내어 써도 고갈되지 않는다고 했다. 노자에게 ‘빔’(虛)은 존재의 가능태이자 도(道)의 모습이다. 그에게 마음공부는 채움(有爲)이 아니라, 비움(無爲)이다. ‘허’(虛)의 여유를 지니는 만큼 존재는 자유롭다. 노자철학에서 ‘빔’(虛)을 유지하는 게 자연(自然)이고 도(道)이다. 그래서 무위(無爲)․무욕(無慾)․무아(無我)․무명(無名)이 곧 도(道)의 모습이다. 그래서 노자철학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도(道)는 ‘계곡의 신’(谷神)과 같아 결코 죽지 않으니 이른바 ‘신비의 여인’(玄牝)이란다. ‘곡신’(谷神)은 골짜기 가운데의 빈 곳이다. 여기 ‘계곡의 신’(谷神)은 도(道)의 모습을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신비의 여인 ‘현빈’(玄牝)은 천지의 근본(어머니)이란다. 노자는 ‘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갓난아기, 통나무(樸), 물과 계곡, 그리고 여인이 등장한다. 여기 ‘도’(道)는 어머니와 같다. 도올은『노자』 전체를 통하여 가장 시적인 장을 뽑으라면 ‘곡신불사’(谷神不死) 장(6장)을 택하겠다고 했다.

 

『노자』에는 “스스로 그러하다”(It is so of itself.)는 ‘자연’(自然)이 하나의 열쇠말로 등장한다. 『노자』 81개의 장에서 사상적으로 가장 포괄적이면서 핵심적인 장으로 25장이 꼽힌다. 「혼돈 속에 생성된 것이 있었으니 천지보다도 앞서 생겼다. ...(중략) 나는 그 이름을 알 길 없어, 그것을 일부러 글자로 나타내어 (道)라 하고, 억지로 이름 지어 크다(大)고 말하지. ...(중략) 그러므로 도는 크고, 하늘은 크고, 땅은 크고, 왕(사람) 또한 크도다.」(有物混成, 先天地生. ...(中略) 吾不知其名, 字之曰道, 强爲之名曰大. ...(中略) 故道大, 天大 , 地大, 王亦大.) (『老子』25장)

 

천지(天地)는 혼성(混成)의 상태에서 선택된 가능성이며, 그 천(天)과 지(地)는 시간 속에서 어지럽게 섞여 있는 만물과 상호교섭 한다. 그런데 그 혼성자가 누구의 아들인지 알 수가 없어 “천지보다 앞서 생겨났다”고 말한 것이다. 이름이란 어떤 형체의 규정성과 관련된다. 그러나 도(道)는 어떠한 형체적 규정성도 거부하기에, 그 이름을 알 수 없다는 게다. 그러나 굳이 문자로 나타내자니, 도(道)라 말한다. 그리고 억지로 이름 지어 ‘크다’(大)고 한 것이다. 그 크기로 말하면 도(道), 천(天), 지(地), 그리고 사람(王)도 크다. 즉, 道-天-地와 필적만한 것으로 사람(王 =人) 역시 크기에 사대(四大)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즉,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道)를 본받고, 도(道)는 스스로 그러함(自然)을 본받는다. 그런데 여기 사람(人)은 地-天-道 모두에 연관된다. 따라서 사람은 땅을 본받고, 사람은 하늘을 본받고, 사람은 도(道)를 본받아 스스로 그러함(自然)의 경지까지 도달하는 것이다. 그래서 천․지․도(天․地․道)와 더불어 사람(人)이 큰 것이다. 하여 <천부경(天符經)>에는 ‘人中天地一’이라 하여 “사람이 하늘과 땅의 가온(中)을 얻어 비로소 ‘천지인’의 하나가 된다.”고 했다. 필자가 보기에 노자철학은 높은 수준에서 자연주의와 인간주의를 결합한 합자연(合自然)주의다.

 

동양철학에서 자연과 사람의 관계는 하나의 그물망으로 얽히고 짜여 있다는 걸 종교적 가르침으로 승화한 사람이 석가다. 붓다가 깨침을 얻은 후 처음 말한 ‘정법’이란 다름 아닌 ‘연기법’(緣起法)이다. 『잠아함경』에는 ‘연기’(緣起)를 이렇게 푼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此有故彼有)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此生故彼生)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도 없다.(此無故彼無)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도 멸한다.(此滅故彼滅)

 

이는 모든 존재는 하나의 예외도 없이 상호의존적 관계에 있다는 게다. 존재의 상호의존성은 두 가지 함의를 갖는다. 하나는 존재 간의 ‘인과관계’다. 이 세상에 원인 없이 존재하는 건 없다. ‘저것’이 있기에 ‘이것’이 있다는 건 분명히 ‘저것’이 ‘이것’의 존재 원인이라는 게다. 다른 하나는 모든 존재는 다른 것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온전히 존재할 수 있다는 게다.

 

여기 ‘연기적 인과’가 ‘과학적 인과’와 다른 점은 과학에서 인과는 조건통제의 범위 내에서 결정되지만, ‘연기적 인과’는 조건통제 없이 훨씬 복잡하고 원초적인 원인에까지 소급한 인과관계를 문제 삼기에 과학에서 말하는 환원적 결정론이 연기적 인과에서는 성립하기 어렵다.

 

세상에는 다른 존재와의 관계를 벗어나 그것 스스로의 독립된 존재도 없고, 다른 존재와 구분되는 그 사물 고유의 성질이 없기에, 불교에서는 일체 존재에 자성(自性)이 없다는 게다. 그래서 대승불교에서는 연기(緣起)=무자성(無自性)=공(空)이라는 등식을 세웠다. 세상에 독립된 실체가 없다는 것은 실재하는 모든 것은 부단한 사건과 과정들로 이루어졌다는 게다. 해서 우주 전체 혹은 그 속의 모든 존재가 분리할 수 없는 하나(undivided wholeness)의 그물망의 유기체적 존재라는 게다. 인간을 비롯한 우주만물은 하나의 유기체이고, 그게 곧 자연이다.

 

아인슈타인은 “우리 모두는 아주 먼 곳에 있는 보이지 않는 우주의 연주자가 연주하는 신비로운 음악에 따라 춤을 추고 있다.”고 했다. 오늘 우리가 ‘자연친화적 삶’을 거론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연기적 삶’의 복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일컫는 ‘자연 친화’에서 그것이 함의하는 내재성과 통합성에 주목할 필요기 있다.

 

자연 친화의 내재성은 『중용』 첫 머리에서 말하는 “하늘이 명하는 것이 성(性)이고, 하늘이 품부한 이 본래성에 따르는 게 곧 도(道)”(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라는 ‘본성회복’의 삶이다. 나아가 자연 친화의 통합성은 위에서 말한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의 합일이고, ‘참찬화육’(參贊化育)이다. 즉, 사람은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어야 천지와 더불어 온전한 일체적 존재가 된다는 게다.

 

이상에서처럼 본 발제에서는 안전을 위한 개념적 기초를 노자의 무위자연사상과 불교의 연기성에 의거하여 논의하였다. 노자와 붓다의 가르침을 안전과 연관한 자연친화적 삶이라는 당대의 시대적 요청에 비추어 되짚어 본 게다. 이런 개념적 기반 위에서 몸의 안전과 마음의 안정(평온)을 함께 향유하는 지속 가능한 삶의 형식과 그 실제적 문제는 무엇인가를 짚어보고자 한다.

 

2. 지속 가능한 삶의 형식과 안정/안전

 

언필칭 21세기는 ‘(초)불확실성’의 시대이자 ‘위험사회’다. 그만큼 안전이 절실한데도 물질적 풍요와 편의성에 길들여진 현대인은 ‘안전 불감증’에서 쉽게 헤어나질 못한다. 문제는 무뎌진 의식상태다. 지구적 중대 문제에 대한 위기의식의 결여가 문제다. 자족적 단위로서 우주적․지구적 ‘온생명’ 속의 의존적 하위단위로서 ‘낱생명’인 우리 인간세계의 지속 가능한 생존을 위협하는 중대 문제들은 무엇인가? 이론물리학자인 장회익(2014)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낱생명으로서의 자신과 한층 고차적인 단위로서의 인류, 그리고 우주적 생명체로서의 ‘온생명’을 차례로 ‘나’로 의식하는 ‘다중적 주체’로 거듭나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온생명 안의 신경세포적 기능을 지닌 존재다. …(중략) 하여 우리가 온생명에 대한 의식의 주체, 특히 그 느낌의 주체에 이를 수 있다면, 생태위기를 비롯한 당면문제들을 풀 수 있을 것이다. (장회익, 2014, 298-369)

 

그는 우리 인간이 우주적 ‘온생명’ 안의 다중적 주체로서 신경세포적 기능을 지닌 존재로 스스로를 의식하고 규정할 때에 생태위기를 비롯한 세계적 당면문제들을 풀 수 있다고 했다. 지구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다. 지구에 생명의 뿌리를 내린 모든 존재의 공생적 관계망이 지구다. 『총․균․쇠』의 저자로 우리에게 두루 알려진 재레드 다이아몬드(J. Diamond)는 인류의 내일에 대한 중대한 질문을 제기한 『나와 세계』(2016)에서 세계의 중대한 문제로 기후변화의 문제, 환경자원의 관리, 그리고 불평등의 문제 등 세 가지를 들었다. 이하에서는 우리에게 지속 가능한 삶의 형식으로서 이들 각각의 문제가 어떤 함의를 지니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단 여기서 불평등의 문제(이 부분은 ‘안전을 위한 제도 찾기’에서 다루어 질 것이므로) 대신에(혹은 그와 연관해) 생활 속의 위험 문제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1) 기후변화의 문제

 

지금 지구는 열병에 걸려 있다. 우리는 지난여름의 지독한 더위와 열대야를 악몽처럼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세계기상기구(WMO)는 전 지구 평균기온이 높았던 1위부터 20위까지 모두 지난 22년 동안 나타났고, 특히 2015년에서 2018년 사이에 역대 더웠던 해의 1에서 4위가 포함되어 있단다. 게다가 기후변화를 유발하는 온실 가스는 지난해에 사상 최대치를 기록해, 산업화 이전(즉, 1850-1900년) 대비 지난해 이산화탄소는 146%, 메탄은 257% 늘어났다는 게다. 이런 추세라면 이번 세기말에 지구 평균 온도가 3도에서 5도까지 상승할 수밖에 없단다(경향신문, 2018.11.30). 엄청난 기후재앙이 예상된다.

 

2015년 말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의 파리기후협정 채택시 합의목표는 “산업화 이전수준 대비 지구평균 기온 상승을 2도보다 (현저히)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고, (적어도) 1.5도까지 제한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었다. 하지만 1.5도로 기온상승을 막는다면 인류는 과연 안전할까? 또, 그게 지금 우리에게 가능할까? 금년 10월 인천에서 열린 IPCC의 48차 보고서에서는 한층 절박한 결의문을 채택해서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한다. 즉, 인천보고서(2018.10)는 “1.5도 이내로 기온상승을 막으려면 2030년까지 탄소배출을 45% 줄여야 하고, 2050년까지는 배출량을 제로로 만들어야 하며, 나아가 이미 배출된 탄소를 대기로부터 포집(捕執)해야 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 이치선(2018)은 <기후변화의 최전선>에서 이렇게 밝힌다.

 

환영할 만한 결정이지만, 이 보고서에는 (온실가스의) 메탄 분출에 대한 아무런 검토나 대책이 없다. 그러나 동시베리아 북극 대륙붕의 (영구동토층인) 메탄하이드레이트에서 메탄 유출이 본격화되면 기온이 1.5도를 넘어설 것이고, 이는 영구동토층을 자극하여 대규모 메탄 방출을 불러올 것이다. 이 와중에도 인류는 화석연료 연소를 지속하고 있을 것이다.(이치선, 2018, 22)

 

참으로 끔직하다. 그러면 이런 지구 온난화의 영향이 우리에게 미칠 주요 결과들은 어떤 것일까? 재레드 다이아몬드(2016)는 그 중요 영향으로 가뭄, 식량생산 감소, 열대성 질병, 해수면 상승 등을 들고 있다. 여기에 파생되는 재앙들이 어떻게 상호의존적 상승효과를 초래할는지 아무도 정확히 예단하기 어렵다. 이제 생물과 환경이 상호작용하며 자기조절해온 ‘가이아1.0’ 시대는 지났고, 인간의 자원 소비량이 급증하면서 불안정한 지구 순환시스템을 의식적(체계적)으로 조절할 필요가 절박해진 ‘가이아 2.0’시대가 도래 했다.

 

하지만 최근 ‘유엔 배출격차 보고서 2018’에 의하면 지구 온난화의 주범인 온실가스 배출량이 4년 만에 증가세로 돌아서, 이런 추세라면 이번 세기 말에 지구의 기온은 산업혁명 전에 견줘 3.2도나 오를 것으로 예상되어 엄청난 재앙이 우려된다. 특히 지난해 미국의 파리 기후변화협정 탈퇴와 화석연료 채굴․사용 완화 등 기후변화에 대처하는 노력에 제동이 걸리면서 사태는 더욱 어렵게 꼬여가고 있다. 이 보고서는 이산화탄소 배출을 삭감하려는 국가적 노력이 흐트러지는 가운데, 경제성장이 이산화탄소 배출 증가로 나타난 것(한겨레, 2018.11.29)으로 설명한다.

 

일부 낙관론자들은 이런 기후변화에 과학기술적으로 대응하는 방법으로서 ‘지구공학’(geo-engineering)의 기여 가능성에 기대를 건다. 하지만 여기에는 엄청난 비용이 소요되고 거대 프로젝트의 실험과정에서 미치는 역기능적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어, 그 효과는 미지수라는 게 일반적 평가다.

 

다이아몬드는 『나와 세계』(2016)에서 지구에 인간이 미치는 인간영향(human impact)을 다음처럼 명쾌한 공식으로 제시한다. 즉, 세계인구와 일인당 평균 인간영향(human impact) = 한 사람이 소비하는 평균 에너지 자원량 + 폐기물의 생산량이다. 이 공식에 의하면, 유럽과 미국 부유국의 1인당 평균 자원소모율이 가난한 국가보다 32배나 높다. 인구 6천만 명에 불과한 이탈리아 자원소모량이 10억 명의 아프리카인 전체 자원량 소모보다 2배나 많다는 게다(J. Diamond, 2016). 따라서 이런 인간영향을 줄이기 위해서는 화석연료를 덜 태우고, 재생 가능한 대체 에너지로의 전환을 서둘러야 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지구온난화의 위기, 환경공해, 자원고갈을 막는 마술지팡이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환상이다. 에너지와 물자의 ‘극적인’ 축소(자본주의하에서는 불가능한 일), 지속가능한 경제시스템을 만들어내는 것 말고는 대안이 없다는 게다(P. Dolack, 2018). 지구를 구하기 위한 지속 가능한 경제시스템의 창출과 그 실천이 절실하다. 일찍이 바오로 6세 교황도 국제연합 식량농업기구에서 “가장 뛰어난 과학적 발전, 가장 놀라운 기술능력, 가장 엄청난 경제성장도 참다운 사회적 도덕적 발전과 함께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결국 인간을 대적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지구는 하나 뿐인 우리 공동의 집이다. 영국의 동물학자 데이비드 애튼버러(92)경이 유엔기후변화총회(2018.12)에서 “인류 문명 붕괴와 생태계 멸종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한겨레, 2018.12.05)는 호소는 우리 모두를 숙연하게 한다. 하지만 이산화탄소의 주요 배출국인 미국의 탈퇴, 파리기후협약으로 이산화탄소 배출 감축 의무를 부여받은 개도국들의 비협조는 여전히 걸림돌이다. 게다가 남미 브라질도 극우 대통령 당선 뒤 온난화 대처에 부정적 입장을 드러내며 내년 유엔기후변화총회 개최 취소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지구의 미래가 암담하다.

 

(2) 환경자원의 문제

 

‘환경문제’는 보다 큰 ‘나’인 온생명의 생존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해서 생태계의 온생명적 허용치를 분명히 산정하고 개발의 총량을 이 범위 안에서 엄격히 제한해야 한다(장회익, 2014). 하지만 우리는 불을 지핀 채로 솥 안의 따뜻한 물속에서 지금의 물질적 풍요를 마냥 향유하는 데에 길들여진 개구리와 같은 운명이다.

 

게다가 어느 날 ‘미세먼지’ 문제는 한국인의 일상에서 가장 큰 불안문제로 제기되기에 이르렀다. 최근 유엔환경계획(UNEP)이 “매년 대기오염으로 인해 700만 명이 조기사망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400만 명이 아시아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UNEP는 ‘아시아․태평양 지역 대기오염’ 보고서에서 “아시아지역 인구의 92%에 해당하는 43억 명이 오염된 공기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면서 배기가스 등을 줄이기 위한 획기적 조처를 취해야한다고 경고한다.(중앙일보, 2018.10.31)

 

최근에는 우리나라에서도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 등 대기오염 물질에 오래 노출되면 폐암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암 사망 위험이 최고 17%까지 높아진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대기오염 중에서도 초미세먼지, 미세먼지, 이산화질소가 특히 암 사망 위험을 증가시키며, 말기 암보다 초기 암에서 사망률을 더 높이는 것으로 나타났다(한겨레, 2018.11.29)는 게다. 하여 세계보건기구에서는 폐암에 대한 영향을 고려해 미세먼지를 1급 발암 물질로 규정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도시화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지구는 시멘트로 덥혀가고 있다. 중국의 1년 동안 시멘트 소비량은 미국의 5년 치 소비량을 능가하고 있다. 한국의 시멘트 공해는 어떤가? 최병성(2015)은 대한민국 쓰레기 시멘트의 비밀을 이렇게 고발한다.

 

“평생 벌어 안 먹고 안 입고 산 내 집 달랑 한 채, 그게 쓰레기였군요. 씁쓸한 현실이네요.”…(중략) 집 안에 오래 머물수록 쉼과 회복이 되기보다 몸이 병들어 간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방사능에 오염된 고철로 만든 철근, 온갖 산업쓰레기로 만든 시멘트, 비료를 빼고 남은 찌꺼기로 만들어 라돈가스가 나오는 석고보드, 액상 폐기물을 재활용해 만든 콘크리트 혼화제, 이게 바로 오늘 우리 가족이 살고 있는 비싼 집의 현실이다.(최병성, 2015, 75)

 

필자는 위 글을 인용하면서 많이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지금은 이 책이 나온 덕분에 좀 더 사정이 나아졌으리라 믿는다.

인류 문명사에서 도구사용의 발전과정은 석기시대에서 철기시대를 거쳐, 19세기 말 이래는 ‘플라스틱’시대로 변천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50년 이래 2016년까지 생산된 플라스틱 생산량은 83억 톤에 달한다고 한다. 이게 철강 생산 무게가 아니라 플라스틱 생산량의 무게라면 정말 엄청난 생산량이다. 이런 상태로 간다면 2050년까지 플라스틱 생산량이 무려 340억 톤에 이를 것으로 전망한다(경향신문, 2018.10.25).

 

지금 우리의 일상에서 플라스틱 용기 남용 문제는 심각한 재앙이다. 이런 추세로 간다면, 향후 30년 내에 바다에 물고기보다 버려진 플라스틱 량이 더 많을 거란다. 지금 우리가 먹는 생선은 이미 옛날 맛 나는 그 생선이 아니다. 일회용 플라스틱 용기를 만드는 데는 5초 밖에 걸리지 않고, 그 용기를 사용하는 건 불과 5-10분이지만, 그것이 완전히 분해되기까지는 무려 500년이 걸린다. 부메랑처럼 돌아오는 미세플라스틱, 이제 우리들의 혈액 속에까지 파고든다고 경고한다.

 

115개의 플라스틱 컵, 하드 플라스틱 19개, 플라스틱 병 4개, 플라스틱 백 4개, 기타 플라스틱 1000여개 총 6kg에 달하는 이 플라스틱 제품들은 분리수거장이 아닌 인도네시아 해변의 죽은 고래 뱃속에서 나온 쓰레기들이다. 인도네시아는 연간 320만 톤의 플라스틱 쓰레기를 배출하고 있으며, 이 중 약 130만 톤이 바다로 흘러들고 있다. 이는 중국 다음으로 많은 것이라고 한다(중앙일보, 2018.11.21). 해마다 800만 톤의 플라스틱 쓰레기가 바다에 흘러들고, 바다에는 51조 개의 미세플라스틱 조각이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이것은 우리 은하의 별보다 500배나 많은 수다. 바다 쓰레기는 800종 넘는 바다 생물에 해를 끼치는데, 바다 포유류의 40%, 바닷새의 44%가 바다 쓰레기를 먹고 있다(한겨레, 2018.12.01).

 

이런 추세로 간다면, 2100년 인류가 하루에 버리는 쓰레기 규모는 900만에서 1200만 톤에 이르고, 현재 하루 배출량은 500만에서 600만 톤에 이른다. 이제 쓰레기는 인류 경제활동의 필연적 생산물이 되었다. 쓰레기를 부산물로 보고 구축한 환경이론이나 경제이론은 현실을 외면한 체계다. 앞으로 쓰레기를 어떻게 하면 줄이고, 또 그것을 재활용할 것인지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대응해 가야한다.

 

(3) 생활 속의 위험

 

몸과 맘은 둘인 듯 하나다. 이른 바 ‘불이’(不二)의 관계다. 생활 속의 위험과 연관해서 마음의 안정(평온)과 몸의 안전을 위한 삶의 형식을 함께 고민해 보자. 일상생활에서 우리들은 자기가 생각하는 바에 따라 행동을 선택하게 되고, 선택한 행동이 지속되는 동안 습관이 형성된다. 마침내 굳어진 습관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한다. 그래서 공자도 사람은 태어날 때는 그 본래성이 비슷하지만(性相近), 살아가는 동안 쌓인 습성은 서로 엄청 다르다(習相遠)고 했다.

 

시대에 따라 변화를 요구하는 압력과 위기는 개인차원에서부터 국가와 세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차원에서 맞닥뜨릴 수 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2016)는 개인이든 국가든 외적 압력과 내적인 압력에 성공적으로 대처하려면 ‘선택적 변화’(selective change)가 필요하다고 했다. 선택적 변화에 집중하는 동안 개인이든 국가든 위험에서 헤어날 수 있는 길을 찾아낸다.

 

뉴기니 사람들은 부주의한 사람들에게 닥친 운명을 통해 죽은 나무 아래에서는 잠을 자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을 배웠단다. 다이아몬드는 처음에 이것이 뉴기니인들의 편집증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들의 교훈을 통해 ‘건설적 편집증’은 위험을 피하기 위해 타당성을 지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뉴기니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으로 우리가 그냥 한 번 행할 때는 위험수준이 무척 낮지만, 그 행동을 반복하면 위험의 가능성이 누적되므로 결국에는 그 행위로 인해 죽음을 맞을 가능성이 커진다는 게다. 이런 위험을 피하는 방법에 대한 교훈이 그가 말하는 ‘건설적 편집증’이다

 

우리는 인사하듯 ‘조심(操心)해라’는 말을 일상에서 되풀이 한다. 운전 조심해라, 감기 조심해라… 등. 마음을 조신하게 가다듬는다는 의미에서 ‘操心’은 참 좋은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막상 일상적으로 노출된 사소한 위험들에 대해서는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자동차와 음주, 사소한 낙상(落傷), 심장마비 등 비전염성 질병 같은 우리에게 익숙한 위험은 과소평가되기 쉽다. 반면에 위험의 충격이 큰 테러리스트 공격, 항공기 추락, 원자력 발전소 사고, 유전자 조작식품의 영향 등은 위험순위에서 기실은 그리 높지 않다. 물론 위험의 충격이 큰 것들은 그것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사소한 일상의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우리에게 ‘건설적 편집증’은 여전히 긴요하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과대평가하는 위험들의 공통점은 우리 개인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위험이자 선택의 여지가 없는 위험이면서 단번에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위험이기에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에 비해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위험, 우리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선택해서 받아들이는 위험은 과소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자신의 일상적 위험에 대한 교훈을 이렇게 고백한다. 이것은 우리들에게도 똑 같이 유효하다.

 

뉴기니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건설적 편집증을 적절히 활용합니다. 쓰러지는 나무가 위험하지만 뉴기니 사람들은 여전히 숲에서 밤을 보냅니다. 다만 죽은 나무 아래서 야영하지 않으려고 조심할 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도 샤워를 피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매일 샤워를 합니다. 다만 조심해서 샤워를 합니다. 나는 테러리스트의 공격이나 유전자 조작식품, 원자력 발전소의 사고보다 샤워와 사다리와 자동차에 더 주의를 기울입니다. 건설적 편집증, 이것은 내가 뉴기니에서 연구하며 배운 가장 큰 삶의 교훈입니다. 이 교훈이 여러분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강주헌 옮김, 2016, 145-147).

 

우리는 앞에서 논의한 기후변화의 문제나 환경자원의 관리에 대해서도 일상적 생활 속의 위험처럼 ‘건설적 편집증’을 갖는 게 퍽 절실하고 긴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리들에게 ‘생태적 회개’의 삶에 대해 “환경 위기는 깊은 내적 회개를 요청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 생태적 회개입니다.”(찬미받으소서, 217항, 156)라고 간곡히 일러준다.

 

3. ‘지구 구하기’의 생각과 실천

 

기후변화에 따른 생태위기, 환경자원 관리의 절박성은 우리들에게 ‘지구 구하기’ 문제를 당면한 중대 과제로 삼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때마침 현대 자본주의 산업문명을 ‘생태문명’으로 전환하는 것을 소명으로 삼는 생태사상가이자 신학자인 존 캅 주니어(J. B. Cobb, Jr.)가 최근 그의 한국 방문 기념으로 『지구를 구하는 열 가지 생각』(2018)을 우리들에게 선사했다.

 

캅은 경제발전지표인 GNP의 대안으로 지속가능한 경제복지지수(Index of Sustainable Economic Welfare)를 개발하고 후에 GPI(Genuine Progress Index)로 바꿔, “1인당 글로벌 GPI는 1978년에 정점이었는데, 이것은 경제발전의 사회적 환경과 비용이 그 이후로 이익을 넘어섰다는 의미다. 말하자면 지속 가능한 경제발전의 관점에서 봤을 때, 1978년을 정점으로 그 이후의 경제발전은 지구를 위해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더 큰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는 게다.

 

그에 의하면, 현대 문명세계는 지구의 생존 한계를 넘어 섰기에 문명붕괴는 목하 진행 중이라는 게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중요한 질문은 현대의 물질문명 번영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는가? 문명붕괴의 폐허에서 우리는 지속 가능한 생태문명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캅은 유기체철학 혹은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이야말로 최상의 생태적 사고와 인본적 사고를 결합한 것으로 본다. 이것은 과학적․종교적․윤리적․예술적 통찰력을 한데 엮은 철학이다. 그는 이런 철학적 관점에서 지구를 구하는 희망적 함의를 담은 제안을 다음처럼 제기한다.

 

첫째로, 실재는 상호 연관된 사건들로 구성된다. 따라서 인과의 연결고리 과정에서 사건의 맥락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그에 의하면 모든 사건은 부분적으로 육체적이다. 이것은 특정 사건이 과거로부터 많은 것을 물려받았다는 뜻이다. 동시에 모든 사건은 부분적으로 정신적이다. 이것은 사건이 스스로 선택한 가능성들을 포함한다는 뜻이다.

 

둘째로, 무엇이 얼마나 가치 있느냐고 할 때, 거기에는 내재적 가치의 위계가 있다. 가치란 우리가 좋은 쪽으로 뭔가 증가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연속적인 사건 경험의 내재적인 질에 대한 관심을 갖기 마련이고, 해서 인간에게는 내재적 가치의 지속적 증가에 대한 거의 무제한적인 관심과 열정이 요청된다. 화이트헤드는 모든 ‘생명은 강도’라 했다. 즉, 생명은 먹이를 파괴하는 데 의존한다. 이 과정에서 내재적 가치가 파괴된다.

 

셋째로, 하나님은 전체의 전체를 위한 가치의 극대화를 중시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주 전체가 포괄적 가치의 증가를 명령받았다고 믿는다. 우리에게는 지구 전체에 대한 관심의 넓이가 도덕의 척도다. 캅은 종교적 각성에 기초한 생태적 삶(회개적 삶)의 가치를 강조한다.

 

넷째로, 인간에게는 자신의 고유한 가치와 함께 공유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인간은 하나의 종(種)이면서 유(類)적인 존재이기에 지구에서 인류가 현존재로 진화해 오기까지 파괴한 자연과 생명에 대한 고유한 책임을 자각해야 한다. 우리 인간이 지구에 끼친 피해는 세계 스스로 치유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하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건 방향을 바꾸는 집단적 회개로서의 ‘메타노이아’(metanoia)다.

 

다섯째로, 교육은 지혜로운 인간의 육성에 기여하는 것이어야 한다. 통찰력이 상실되고 분절된 지식기능 위주의 교육은 자칫 선보다 해악이 크다. 오늘날 분과학문의 칸막이에 갇힌 ‘연구중심대학’은 지구 살리기에 별반 도움 되지 않는다. 우리에게 정보량은 언제나 넘쳐나지만 지속 가능한 사회발전과 경제 변화에 대한 연구는 턱없이 부족하다. 지구온난화 가속화는 분명 염려스런 사실이지만, 현대인에게는 축구점수에 대한 정보보다 중요치 않을 수도 있다. 지혜는 중요성을 가리는 판단에서 드러난다.

 

캅은 새로운 문명을 위한 노력에서 무엇이 생태문명의 장애인가를 묻는다. 그가 적시한 생태문명의 여덟 가지 장애물 가운데, 여기서는 다음 네 가지로 집약해 본다.

 

(1) 지나치게 교회나 성경, 자신들의 ‘하나님’ 만을 절대화하는 기독교 근본주의를 경계한다. 그 자신이 신학자이지만, 예수가 몸소 실천한 성스러운 공영과 공존을 외면하는 좁은 기독교주의를 생태문명의 장애물로 든다.

(2) 물질과 정신을 이분법으로 나누는 기계론적 모델을 탈피해 유기체적 모델로 이행할 것을 권고한다. 그가 지지하는 구성적 포스트모더니즘은 순수한 물질과 순수한 정신 둘 다 거부할 것을 요청한다.

(3) 좁은 민족주의에 기반 한 경제우선주의와 비대한 금융 권력을 경계해야 한다. 민족 감정은 평화에의 위험이자 생태문명의 장애물이다.

(4) 미국 예외주의와 그에 따른 국방비 과잉지출을 경계해야 한다. 불행하게도 미국 예외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일본 예외주의와 비슷하다. 세계의 눈앞에서 자신들이 행한 악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는 결코 안전하지 않다.

 

그러면 우리가 새로운 생태문명의 토대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가. 다시 네 가지로 집약해 본다.

(1) 각자도생하는 개인적 이기주의에서 공동선을 위해 헌신하는 공동체중심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기실은 더 큰 사회의 부분이며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의미 있게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형이상학이 필요하다.

(2) 감각적․쾌락적 경험주의에서 성찰적․진보적 경험주의로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 건강한 문명은 진보적 경험주의에 의해 구축되지만, 감각적 경험주의에서 구축된 문명은 스스로를 파괴할 운명에 놓인다.

(3) 우리-그들이라는 양분된 갈등적 사고에서 전체로 통합과 균형을 이룬 하나 된 지구가족에로의 충성이 발휘돼야 한다.

(4) ‘생명강도‘를 예사로 자행하는 인간 중심성을 절제하고 모든 생명과 더불어 존재하는 생명박애(biophilia)를 지향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생명을 우리 자신과 함께 어디에나 존재하는 ’생존의 힘‘으로 이해해야 한다.

 

존 캅 주니어는 이 책 말미에서 친절하게도 <한국에서의 생태문명>을 말한다. 이 글에서 그는 “한국에 대한 내 느낌은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 사이의 거리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짧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생태문명을 향해 힘을 합치기로 결심한다면 그 성과가 조만간 나타날 것이다.”(한윤정 편역, 2018, 263)고 했다. 그는 한국의 경제적 압축성장을 높이 평가한다. 압축발전의 저력이 생태문명의 건설에도 같은 속도로 한반도에서 전이되기를 기대한다. 제발 이 기대를 우리 스스로가 저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런 기대와 소망의 진정한 가능성을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리들에게 다음처럼 일러준다.

 

그러나 아직 모든 것을 잃지는 않았습니다. 인간은 최악의 것을 자행할 수 있지만, 또한 자신을 억압하는 모든 정신적 사회적 제약을 극복하여 자신에게서 벗어나 다시 선을 선택하며 새롭게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솔직하게 살펴보고, 강력하게 불만을 제기하고, 참자유를 향한 새로운 길에 나설 수 있습니다. 그 어떠한 체제도, 진선미에 대한 우리의 열린 마음,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은총에 응답하도록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심어 주신 그 능력을 완전히 억누를 수는 없습니다. 저는 이 세상 모든 이에게 자신의 존엄을 잊지 말도록 호소합니다. 아무도 이 존엄을 빼앗을 권리가 없습니다. (찬미받으소서, 205항, 146)

 

4. 마무리

 

원불교를 창도한 소태산 박중빈(1891-1943)은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고 했다. 물질개벽에 정신개벽이 끌려가는 게 아니라 정신개벽이 물질개벽을 조정․선도해야 한다는 게다. 정신개벽이 체(體)이고, 물질개벽은 그 용(用)이다. 에듀아르 테트르(E. Tetreau)는 <돈의 장벽을 넘어>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말도 안 되는 벽을 허물어버릴 것을 촉구한다. 인간을 갈라놓고 인간 사이에서 불평등과 경쟁적 폭력을 심화시키는 이 광기어린 돈의 벽, 인간성을 박탈하는 (디지털)기술의 벽을 말이다. 이 벽은 보이지는 않지만 그 힘은 대단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영혼 없는 기계를 위해 민주적, 경제적, 사회적 삶을 저버릴 것을 강요하고 있다.“ 이 장벽을 허물어버리시오.” 누가, 너무 늦지 않게, 인간을 우위에 서게 해줄 이 인간의 의식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전광철 옮김, 2015. 95-96)

 

불확실성의 시대에 문명위기/문명붕괴는 우리를 불안의 심연에서 헤어나기 어렵게 한다. 어찌할 건가? 우리에게 자연친화적 삶은 곧 연기적(緣起的) 삶의 복원이다. 노자는 되돌아 봄(감)이 도(道)의 움직임(反者, 道之動)이랬다. 우리에게 자연친화적 삶은 곧 ‘본성회복’의 삶이다.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기 이전으로 되돌아가는 복락원(復樂園)의 길이다.

 

올해 93세인 존 캅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증손주 두 명이 있는데, 그를 가장 슬프게 하는 것은 “내가 태어난 세계만큼 호의적이고 희망 있는 세계를 그들(증손주)에게 남겨주지 못한다는 것”이란다. 아래에서 말하는 판도(Pando)의 위기는 그의 슬픔을 잘 반영한다.

 

남부 유타 주에는 40만 제곱미터의 땅에 펼쳐진 사시나무가 있다. 우리에게는 그냥 거대한 숲처럼 보이지만, 실은 유전자가 같고 뿌리가 하나인 하나의 나무다. 분리된 것처럼 보이는 모든 나무들이 실제로는 하나의 유기체다. 그것의 이름은 ‘판도’(Pando)이고, 판도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유기체임이 밝혀졌다. 그것의 통합성이 급격한 변화와 광범위한 파괴로부터 살아남게 해주었으나, 슬프게도 판도는 인간의 파괴적 활동으로 인해 전례 없는 위협에 처해 있다.(『지구를 구하는 열 가지 생각』, 2018, 241)

 

캅은 플란치스코 교황의 <찬미받으소서>를 인용하면서, 우리에게 “플란치스코 교황은 판도(Pando)다.”고 했다. 그럼 우리는? 우리 또한 ‘판도’일 터. 왜냐면 ‘판도’의 속성은 우리 모두에게도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땅을 본받고, 사람이 하늘을 본받아 마침내 자연과 하나 되는 ‘개벽’의 세상이 도래하기를 고대한다.

 

<이 글은 지식과세상 사회적협동조합에서 2018.12.01 강의한 내용을 정리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