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삶의 여정(1)

평촌0505 2010. 8. 4. 10:37

  나는 경북 구미 고아읍 괴평리에서 1945년 광복을 불과 20일 앞두고 세상에 태어났다. 어머니께서 선비가 백마 타고 대국 들어가는 태몽 꿈을 꾼 탓인지 평생을 이렇게 교수 노릇하고 산다. 6.25 전쟁 때는 낙동강을 건너 걸어서 영천을 거쳐 청도까지 고된 피난 길을 갔다 왔다. 피난 길 후유증으로 한동안 나는 걷지를 못하고 방에서 누워 있어야 할 정도 였다. 지금도 6.25 피난길 장면을 보면 그 속에 내가 있지나 않은지, 우는 아이는 또 다른 내또래 아이라는 정감이 간다. 해서 전쟁은 결단코 없어야 한다. 우리에게 어떤 명분이든 전쟁은 악이다. 그리고 저주다.

 

  그 전쟁을 치루고 교실도 제대로 없는 초등학교엘 들어 갔다. 봄에서 여름까지는 나무밑에서 칠판을 걸어놓고 공부했다. 천막교실에서 분유가루 끌인 물로 배를 체우기도 했다. 그러면서 한글과 숫자와 구구단을 익혔다. 그 때는 놀이를 해도 전쟁놀이가 중심이었다. 야생마처럼 산으로 들로 강으로 밥먹고 노는 게 일과 였다. 그래서 이 나이 되도록 심신이 건강한 편이다. 인프라가 튼튼히 구축된 탓이다. 고향에서 구운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우리 마을에서 약 5-6키로 떨어진 구미중학엘 들어 갔다. 들길을 다니면서 영어단어도 외우고 가끔은 주인 몰래 과일을 따먹기도 했다. 중2 때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폼을 잡았다. 여학생들 가방을 실어 주기도 하고 그렇게 사춘기를 보냈다.

 

  고등학교는 부산 형님집에서 동래고등을 다녔다. 촌놈이 이 때부터 대도시로 진출했으나, 당시는 모두가 가난했다. 내가 도시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것도 고향친구들에겐 일종의 특혜였다. 초등학교가 최종학력인 경우가 많았다. 처음에는 고향 생각이 간절했으나, 나름대로 공부는 열심히 해서 2학년 때는 난생 처음으로 급장이란 걸 맡아 해봤다. 범생으로 잘나가다가 고2 때부터 철학 쪽에 관심을 가지면서 교과공부는 등한시 하였다. 그래도 연세대 철학과에 겨우 들어 갔다.

 

 1964년 나의 서울 생활은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피폐했다. 게다가 인생의 방황과 고민은 밑도 끝도 없었다. 그리고 감당하지도 못했다.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대구에서 다시 시작한 것이 한국사회사업대학(오늘의 대구대학교 전신) 특수교육과였다. 특수교육이 나를 살렸고 한국사회사업대학이 나를 구제했다. 그로부터의 인연이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인생은 '세옹지마'라는 말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