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시간강사의 죽음과 대학의 책임

평촌0505 2010. 8. 20. 11:59

시간강사의 죽음과 대학의 책임

 

  어쩌다 대학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한심하고 부끄럽다. 지난주에 1998년 이래 여덟 번째로 대학 시간강사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나 같은 정규직 교수의 죄가 크다는 자괴감이 든다. 다른 사람의 눈물이 언젠가 내게로 되돌아오는 게 세상사의 이치다. 그간 사람이 여덟이나 죽어 나갔는데 대학시간강사의 처우는 뭐가 달라졌는가? 시간강사 신분보장에 관한 법안은 3년 이상이나 국회에 그냥 계류되어 있다고 한다. 게다가 요즘 대학가에서 환경미화원에 대한 학생들의 인격 모독과 대학 당국의 지독한 푸대접이 기승을 부리고 있어 더욱 황당하다. 이쯤 되면 대학이 시장바닥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시장에는 더러 속임수가 있긴 하지만 드러 내놓고 착취구조가 정당화 되지는 않는다. 옛날에 신분서열을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 해서 선비를 으뜸으로 쳤고 장사치를 가장 비천한 신분으로 봤다. 어쩌면 대학시간강사에게는 이게 완전히 뒤집히는 세상으로 가는 형국이다.

 

  대학에서 어머니뻘 되는 청소부 아주머니에게 막말하고 대던 여학생이 있어 ‘패륜녀’라고 언론에서 지탄하고 있다. 그런 학생도 문제지만 그 학생을 가르치는 대학은 문제가 없는가? 내가 보기에 대부분 학생들은 캠퍼스에서 일하는 환경미화 아주머니를 집안일하는 어머니처럼 생각하는 정서가 훨씬 지배적이라고 본다. 환경미화원을 열악한 조건으로 임시 고용하여 용역업체가 바뀌면 해고해 버리기 십상인 대학당국의 ‘패륜’(悖倫)은 어떤가? 대학이 경쟁력을 키운다는 명목으로 기업식 경영을 도입하면서 비정규직제를 쾌도난마(快刀亂麻)처럼 악랄하게 휘두르고 있다. 대학은 학문의 전당으로 신성한 곳이니까 이런 것들이 쉽게 은폐되는지 모르겠다. 비정규직 교수로서 시간강사의 처우는 일반기업에서의 비정규직 처우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열악하다. 우선 임금격차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아무런 신분보장이란 게 없다. 그냥 일회용으로 필요하면 불러 쓰고, 언제든지 용도 폐기가 가능하다.

 

  인재(人材)는 사회적으로 가장 소중한 공공재(公共財)다. 길러진 인재를 적재적소에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국가적 손실이다. 특히 국가적으로 공인된 박사학위를 취득한 고급인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국가의 책임이다. 진정 공익(公益)을 위해 국가가 할 일이 무엇인가? 우리나라의 대학들은 국제적으로 학생 수에 비해 교수 충원 비율이 퍽 낮은 나라로 손꼽히고 있다. 특히 사립대학의 경우 교수 충원은 턱없이 낮다. 전체 강좌 가운데 약 절반 정도는 시간강사들이 맡고 있는 것으로 보면 된다. 학생들 입장에서는 전임교수에게나 시간강사에게나 학점 받기는 꼭 같다. 그러나 강좌당 지출되는 인건비 면에서 보면 양자 간에는 엄청난 격차가 있다. 즉, 학생들이 수강하는 전체 강좌 가운데 싸구려 강좌가 약 절반되는 것으로 보면 된다. 결과적으로 지금의 대학운영 행태는 시간강사로부터 착취하여 전임교수 배불리고 남는 돈으로 흑자재정 비축하는 꼴이다. 이런 모순과 착취구조 속에 견디다 못해 시간강사들이 죽어 나간다.

 

  시간강사들의 자살이유는 경제적 궁핍이 일차적이겠지만, 내가 보기에 당사자로서 더욱 견뎌내기 어려운 부분은 인간적 모욕과 피해의식일 것이다. 흔히 시간강사의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강좌를 제공하는 교수와의 관계가 경우에 따라서는 노예 신분을 연상케 한다. 특히 이번에 자살한 서모씨의 경우 그간 지도교수나 강의추천교수들에게 논문 대필을 엄청나게 했음이 드러나고 있다. 그가 남긴 유서에 의하면, “같이 쓴 논문 대략 54편 모두 제가 쓴 논문으로 교수는 이름만 들어갔으며, 세상에 알려 법정투쟁을 부탁드린다”고 당부할 정도였다. 틀림없이 연구비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도 쥐꼬리 같은 강사료를 미끼로 그렇게 논문쓰기 노력봉사가 강요되었을 것이다. 어쩌다가 전임교수 채용 자리가 나면 목돈으로 거래를 흥정하는 제안까지 받은 적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전임교수에 의해 시간강사들에 대한 핍박과 인격적 모독이 이런 식으로 자행되고 있는 것이 대학문화의 현실이다. 물론 아직 일부대학에서 그렇다손 치더라도 그런 문화는 알게 모르게 대학사회에 버젓이 똬리를 틀고 있다. 스폰서 향응을 관례처럼 받아 온 검사들은 그걸 검찰문화의 전통으로 당연시한다. 아무런 죄의식이나 부끄러움이 없다.

 

  대학이 대학답지 못한 것은 일차적으로 대학인의 책임이다. 내가 보기에 대학시간강사의 처우개선을 비롯한 법적지위 보장은 먼저 대학내부에서 적극성을 보이는 것이 마땅하다. 특히, 사립대학들이 그 열쇄를 쥐고 있다. 왜냐하면 다수의 사립대학 측에서 움쩍하지도 않고 정부쪽에 그 책임을 돌리니 국회에 법안이 계류되는 악순환이 거듭되고 있다. 대학 스스로가 시간강사의 처우개선과 전임교수의 법적 정원 확보에 성의를 보여야 한다. 대학에서 시간강사 처우개선과 전임교수 확보는 동전의 양면처럼 맞물려 있다. 가령 시간당 강사료를 전임교수가 책임시수에서 받는 급여(대우)와 비슷한 수준으로 끌어 올려놓으면, 대학 스스로가 시간강사를 최소화하고 전임교수 충원을 극대화 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고급인력을 최대한 학문의 전당(殿堂)으로 끌어 들여야 한다. 그래야 대학도 살고 사람도 살린다. 단언컨대, 시간강사가 자살하고 죽어나가는 대학가에 어찌 학문이 살아 있다 할 수 있겠는가. 학문은 사람 살리기다. 특히, 죽기 살기로 학문하고자 하는 사람을 우대하는 곳이 대학이다. 당대 대학에서 이어지는 시간강사들의 자살은 학문을 저버린 대학의 탐욕에 의한 타살에 다름 아니다.

슬픈 현실이다. 그리고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2010. 06. 03) 김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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