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말도 많고 탈도 많다. 때로는 참 비효율적인 게 민주주의다. 그래도 인류 역사상 민주주의를 능가하는 대안은 없단다. 진정한 민주주의를 구현한다는 게 지난한 과제다.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4.4 헌재의 탄핵 선고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심한 몸살을 앓았다. 자칫 한국의 민주화가 퇴행하지 않을까 우려하던 차에 오늘 헌법재판소에서 늦었지만 탄핵 선고를 내렸다. 이로써 민주화의 촛불 빛이 다시 살아났다.
민주주의는 연속적 과정의 문제다. 연속의 전체 스펙트럼에서 한쪽 끝이 진정한 민주주의라면 다른 한쪽 끝은 독재주의 혹은 파시즘일 게다. 민주주의가 잘못되면 독재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이승만 정권 말기에 그리고 군사독재 시절에 그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그러고도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의 탄핵은 두 번째로 인용 선고되었다. 해서 외신에서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어려운 직책이 대한민국 대통령 자리란다.
왜 한반도에서, 우리에게 이런 시련이 거듭되는가? 함석헌 선생은 <뜻으로 본 한국 역사>에서 우리 민족의 역사를 ‘고난의 역사’로 압축했다. 고난 속에서 고난을 통해 한민족의 역사는 이어져 온 게다. 해서 우리는 쌓인 한이 많은 민족이다. 나는 한국에서 민주주의 시련의 근원적인 이유를 두 측면에서 해석해 보고자 한다.
그 하나는 분단체제 때문이다. 한반도는 21세기에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 분단은 80년이나 지속되고 있다. 아직도 분단의 끝이 보이질 않는다. 백낙청 교수는 분단체제의 극복을 위한 대안으로 ‘변혁적 중도’를 말했다. 본래 ‘중도’(中道)는 양극단을 버리되 동시에 회통(會通)하고 포용하는 것이다. 이런 ‘중도’를 분단 극복을 위해 변혁적으로 운용하자는 게다. 현실적으로 쉽지 않지 않은 일이지만 그 의지가 중요하다.
다른 하나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압축성장’의 그림자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우리에게 지난 50년 동안의 놀라운 압축성장은 결과적으로 불평등을 심화하는 양극화를 초래했다. 양극화는 사회불안과 적대감을 조장한다. 우리나라는 쌀농사를 기반으로 하는 마을공동체를 강하게 유지해 왔으나, 산업화 이후 고르잖게 잘사는 나라로 급속히 바뀌면서 경쟁적 갈등이 심화했다. 말하자면 압축성장은 압축적으로 갈등을 촉발했다.
2002 월드컵 축구를 유치했을 때 외신기자들은 한국을 ‘다이나믹 코리아’로 평가했다. ‘역동성’은 발전 동력일 수 있지만 자칫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부작용을 수반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민주화는 단기간에 역동적으로 성취되었지만, 동시에 이런저런 부작용을 안고 있다. 해서 잘 나가다가 퇴행하는 역기능을 보인다. 그 과정이 순탄하지 못하고 울퉁불퉁하다.
나는 이번 탄핵사태를 지켜보면서 우리나라에서 민주화의 길은 참 험난하다는 걸 체감했다. 우리에게 민주화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