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2월 이집트에서 발견된 『도마복음』(Gospel of Thomas)은 살아 있는 예수의 어록이자 가르침이다. 프로테스탄트(개신교)는 우리나라에서 특수교육의 성립과 그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인지 우리나라 장애인 가운데 종교분포를 보면 개신교 신자가 약 80% 이상으로 압도적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프로테스탄티즘의 특수교육적 함의를 문제 삼는 데에 너무 등한했다. 장애인을 향한 구원의 종교로서 개신교는 장애인에게 복음 그 자체였다. 물론 예수의 가르침은 당대사회에서 고통 받는 약자를 향한 구원의 메시지가 강하게 담겨 있다.
그렇다면 프로테스탄티즘에서 장애인은 구원의 대상으로만 어필할 뿐, 장애인당사자의 내면적 메타노이아(metanoia)로서 자기구원은 면제되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단호하면서도 명쾌한 답이 『도마복음』에 잘 드러나 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필자는 『도마복음』의 특수교육적 함의를 문제 삼는다. 총체적인 의식 변혁으로서 종교적 ‘메타노이아’는 바로 교육의 내면적 과정(process)으로 전치(轉置)되어야 한다. 그래야 특수교육이 교육답게 바로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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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복음』의 서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는 살아 있는 예수께서 이르시고 쌍둥이 유다 도마가 기록한 은밀한 말씀들이다.”(There are the secret sayings that the living Jesus spoke and Judas Thomas the Twin recorded.) 이 도마복음서의 기록은 살아생전에 예수(the living Jesus)가 한 말씀들(語錄)이다. 그래서 살아 있는 우리는 이 도마복음서를 매개로 살아 있는 예수를 직접 만나야 한다. 김용옥은 『도올의 도마복음 한글역주』(2010)에서 “살아있는 예수를 나의 실존의 본래성과 동일시 할 때만이 예수는 우리 삶의 의미체가 된다.”고 했다.
게다가 여기 예수가 한 말은 ‘은밀한 말씀들’(the secret saying)이라 아무나 알아들을 수 없는 비의(秘意)가 담겨 있다. 그래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천 명 중에서 한 명, 만 명 중에서 두 명꼴”(도마 23절)이라 할 만큼 어렵다고 했다. 그리고 기록자는 예수의 쌍둥이 유다 도마라 했는데, 예수에게 실제로 쌍둥이 형제가 있었는지 어떤지가 중요하지 않다. 도올 김용옥(2010)은 “예수의 말을 예수의 분신과도 같은 쌍둥이가 기록했다는 사실은 곧 그 기록을 읽는 우리 자신도 예수의 쌍둥이, 즉 예수의 분신, 아니 예수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도마복음서는 화자-기록자-독자가 해석학적 일체감으로 ‘감통’(感通)할 수 있어야 한다.
『도마복음』은 “예수만이 유일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대신에, 예수의 가르침을 자신 안에서 깨달으면 누구나 예수처럼 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처럼 기존의 신약 4복음서와는 달리 “믿음이 아니라 깨달음”을 강조함으로써, 『도마복음』은 공관복음(共觀福音)에 포함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오강남, 2009). 류시화는 ‘신의 길 인간의 길’(오쇼, 『도마복음 강의, 2008)에서 도마복음서에서 예수가 말한 것은 “나를 추종하지 말고 나처럼 되라.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의 씨앗을 품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류시화, 2008). 이처럼 도마복음서의 예수는 우리에게 진정한 깨침으로서 ‘마음의 길’을 열어 보였다. 그 길의 (특수)교육적 함의를 찾아 깨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몫이다.
도마(Thomas)가 드러내는 예수는 어디까지나 인간 존재에 내재하는 신성(神性)을 우리 스스로 발견하도록 안내하는 위대한 교사(a great teacher)일 뿐이다. 그래서 “이 말씀들의 해석을 발견하는 자는 누구든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Whoever discovers the interpretation of these sayings will not taste death.) (도마 1절)고 했다. 도마복음서에 적힌 예수의 어록(말씀)은 독자인 나에 의해 해석(interpretation)되어야 하며, 그 해석은 반드시 주체적으로 발견되어야 한다.
여기서 ‘발견’이란 바로 나의 삶 속에서 체현(體現)되는 말씀의 체험이다. 즉, 그것은 살아있는 예수의 말씀이 나의 삶의 체험 속으로 참여하게 만드는 과정이다(김용옥, 2010). 이 대목에서 필자는 『중용(中庸』에서 말하는 ‘지성능화’(至誠能化)를 떠올린다. 그리고 기신론의 ‘발심’(發心)에서 말하는 ‘신해행증’(信解行證)의 ‘증발심’(證發心)을 생각하게 된다. 예수는 자신의 가르침을 내면화하는 과정을 이렇게 말한다.
“추구하는 사람은 찾을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해야 합니다. 찾으면 혼란스러워지고, 혼란스러워지면 놀랄 것입니다. 그런 후에야 그는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Jesus said, "He who seeks should not stop seeking until he finds. When he finds, he will be troubled. When he is troubled, he will marvel, and he will reign over all.") (도마 2절)
“추구하는 사람은 찾을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해야 한다.”는 말을 접하니 『중용』의 구절이 떠오른다. “배우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배울진대 능하지 못하면 도중에 포기하지 마십시오. 묻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물을진대 알지 못하면 도중에 포기하지 마십시오. 생각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생각할진대 결말을 얻지 못하면 도중에 포기하지 마십시오.”(중용, 20장) 『중용』에서는 ‘성’(誠)하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삶의 자세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여기 ‘끊임없는 추구’는 인간 존재의 내면적 삶의 모습이자 과정이다.
이어 『도마복음』에서는 “찾으면 혼란스러워지고, 혼란스러워지면 놀랄 것”이라 했다. 훌륭한 종교적 가르침일수록 “편안한 사람에게는 혼란을, 혼란한 사람에게는 편안을 준다.”(오강남, 2009)고 했다. 여기 ‘혼란스러워짐’(will be troubled)은 기존의 삶에 대한 당혹스런 번민이다. 그래야 ‘메타노이아’(metanoia)가 일어난다. 예수가 공생활을 시작하며 “회개하라”고 외쳤을 때, 그 ‘회개’(悔改)에 해당하는 말이 바로 ‘메타노이아’다. 원래 ‘Metanoia'는 어원적으로 ‘의식(noia)의 변화(meta)’를 의미한다. 이것은 단지 지난 잘못을 뉘우치는 ‘회개’라는 뜻 이상의 ‘나라는 인격주체의 근원적인 변화’(the transformation of one's subjectivity)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 ‘의식변혁’을 통해 우리는 놀라운 경이(驚異)를 맛보게 된다. 도마복음서에서 예수가 말하는 천국(나라)은 일상적 자아가 고통스러운 주체의 변환을 통해 얻는 경이다. 도올은 이 경이는 끊임없이 새로운 경이를 낳아야 하고, 경이는 다른 지속태로 변화하기 마련이라 했다. 그 지속태에 대해 예수는 “경이를 체험하면 너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되리라.”고 했다. 여기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됨’은 내가 ‘지혜의 왕국’에 주인이 된다는 것이다. 내가 ‘나’라는 존재의 왕이 된다는 것은 끊임없는 추구와 고통과 경이의 과정을 거치는 것으로서의 ‘나’에 다름 아니다. 히브리인 복음서(Gospel of the Hebrews)에서는 “경이를 체험하는 자는 누구든지 다스릴 것이요, 다스리는 자는 누구든지 휴식할 것”이라 했다. 여기 ‘휴식’이라는 말에 도올은 주목한다.
여기서 ‘휴식’은 ‘열반적정’(涅槃寂靜)의 ‘적정’이다. 그것은 고요함이요, 평온이요, 구극적으로는 해탈이다. 그것은 죽음이 아닌 생명의 원천이다. 인간은 내 몸의 왕이 될 때에만이 비로소 휴식할 수 있는 것이다. 살아있는 예수가 도마복음서에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첫 메시지는 추구와 발견과 번민과 경이와 제압과 해탈이다. 참으로 놀라운 도언(導言)이 아닐 수 없다(김용옥, 2010, 도마복음한글역주2, p.149).
내가 보기에 도마복음서에서 제시하는 ‘추구-발견-번민-경이-해탈’의 과정은 전형적으로 ‘깨침’을 향한 교육의 과정이다. 도올은 도마복음서 2절의 주제는 우리 ‘주체의 개벽’이라 했다. 즉, 그것은 새로운 천지의 열림을 의미하는 것이다. 추구와 발견, 번민과 경이, 지배와 휴식, 이 세 쌍의 과정이 바로 주체의 개벽 과정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는 우리에게 메타노이아의 체험이 가능하다는 것을 일러준다. 비교종교학자 오강남(2009)은 사실 도마복음서의 이런 가르침은 불교나 유교에서도 비슷한 가르침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본다. 살아있는 예수의 가르침은 다시 이렇게 이어진다.
“너희가 너희 자신을 알 때, 비로소 너희는 알려 질 수 있으리라. 그리하면 너희는 너희가 살아있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 그러나 너희가 너희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너희는 빈곤 속에 살게 되리라. 그리하면 너희 존재는 빈곤 그 자체이니라.”(도마 3절 후반)
도마의 예수는 “네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너희 자신이 알 때, 너희가 하나님께 알려질 수 있으리라”고 했다. 그래서 “네가 네 스스로 살아있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닫지 못한다면, 너는 빈곤 속에 살게 되고, 네 존재는 빈곤 그 자체가 되고 말 뿐이다.”고 가르치고 있다. 도올은 “인간이 부처가 될 수 있는가? 인간이 예수가 될 수 있는가? 인간이 하나님이 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너의 대답은 무엇이냐?”고 물으면서 기원후 1세기의 초기 기독교세계에서는 이런 문제가 아무런 금기 없이 논의되고 있었던 것을 환기 시켜주고 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 깨쳐야 할 것 가운데 내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일찍이 델포이 신전에 씌어 있던 신탁(神託)에도 ‘그노시 세아우톤’ 즉,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이었다. 오강남(2009)은 “내가 바로 살아 계신 아버지의 아들․딸이라는 사실, 내 속에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侍天主)는 사실, 이 하느님이 바로 내 속 가장 깊은 차원의 ‘참나’ 혹은 ‘얼나’에 다름 아니라(人乃天)는 엄청난 사실을 ‘깨달음’-이것이야 말로 바로 이 삶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귀중한 ‘진주’ 같은 진리다.”고 했다.
특수교육은 장애학생의 ‘장애’(disabilities)를 교정(therapy)하거나 보상(補償; compensation)하는 수준에 머물 것이 아니라, 장애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속에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는 엄청난 사실을 바로 깨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 ‘개벽의 특수교육’으로 우뚝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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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노이아’로서 깨침의 문제는 도마복음서 전반에 걸쳐 강조된다. 도마의 예수는 인간 존재의 내면적 각성을 이런 직유(直喩)로 표현한다. “복되도다 사자여! 사람이 그대를 먹어삼키기에 그대는 사람이 되는 도다. 저주 있을진저 사람이여! 사자가 그대를 먹어삼킬 것이니, 사자가 사람이 될 것이로다.”(도마 7절) 이 절에서 말하려는 것은 우리 속에 내재하는 ‘사람됨’과 ‘사자됨’의 두 방향의 힘이다. 여기서 ‘사자’는 우리 속에 있는 길들이지 않은 야수성(野獸性)으로서 정욕 혹은 탐욕을 가리킨다. 도올은 우리 인간에게 “욕정의 극복이란 사실 달려드는 사자를 통째 씹어먹어 버리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라 했다. 인간의 죄악은 모두 내 속에 있다. 그래서 “인간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더러운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이어 도마복음서에는 지혜로운 어부처럼 ‘버림의 결단’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사람 된 자는 슬기로운 어부와도 같도다. 그는 그의 그물을 바다에 던져 작은 고기가 가득 찬 채로 바다로부터 끌어 올린다. 그 가득한 고기 가운데서 슬기로운 어부는 잘생긴 큰 고기 한 마리를 발견한다. 그는 모든 작은 고기를 다시 바다 속으로 던져 버린다. 그리고 어려움 없이 그 큰 고기 한 마리를 가려 얻는다. 들을 귀가 있는 자들이여! 누구든지 들어라.”(도마 8절) 여기서 ‘어부’는 ‘사람 된 자’(the human one)로 곧 ‘사람다운 사람’이다. 슬기로운 어부는 큰 고기 한 마리를 발견하고는 다른 작은 고기들은 모두 바다 속으로 버린다.
이 절의 해석에서 도올은 “예수의 말씀을 해석하고 발견하는 자는 모든 것을 긁어모아서는 아니 된다. 하나의 진정한 아이덴티티를 위해서 사소한 아이덴티티를 버려야 한다. 그래야 그 최종적 목표에 도달할 수가 있다.”고 했다. 살아가면서 참으로 중요한 것을 얻을 줄 아는 사람은 사소한 것들을 과감히 버릴 줄 아는 사람이다. 이처럼 궁극적인 것을 깨닫고 발견한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모든 것에 대한 관심을 버릴 줄 아는 사람이다. 하나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위대하다. 『도덕경』에도 도(道)의 길은 하루하루 들어내는 ‘일손’(日損)이라 했다.
어느 날 제자들이 예수께 “하늘나라가 어떠할지 저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하고 묻자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한 알의 겨자씨와 같도다. 겨자씨는 모든 씨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이로되, 그것이 잘 갈아놓은 땅에 떨어지면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식물을 내니, 하늘의 새들을 위한 보금자리가 되니라.”(도마 20절) 예수의 이 말은 인간교육의 무한한 가능성을 우리에게 시사해 준다. 우리들 속에 잠재적 상태로 내재해 있는 변화(transformation)의 씨앗은 미미하기 그지없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적절한 때나 계기를 만나면 엄청난 변화의 힘을 발휘한다. 이 엄청난 변화의 힘을 “겨자씨가 큰 숲이 된다.”는 비유로 나타냈다. 으뜸 되는 가르침인 종교를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이런 ‘변혁’의 체험은 전형적으로 위대한 교육의 과정이다. 그래서 심층종교와 특수교육은 만나야 한다. 그리고 교육이 종교가 되어야 한다.
이런 변혁의 과정을 크게 배우는 『대학(大學)』에서는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의 단계로 제시했는가 하면, 『중용(中庸』에서는 그 과정이 박학(博學)-심문(審問)-신사(愼思)-명변(明辯)-독행(篤行)으로 이어진다. 선불교의 『십우도(十牛圖)』에서는 그 변혁의 과정이 소를 찾아 나섬(尋牛)-소의 발자취를 발견함(見跡)-소를 봄(見牛)-소를 붙잡음(得牛)-소를 먹임(牧牛)-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 옴(騎牛歸家)-소는 없고 사람만 남음(忘牛存人)-사람도 소도 없음(人牛俱忘)-본래로 돌아 감(返本還元)-세상 속으로 나옴(入廛垂手)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겨자씨가 싹을 틔어 큰 숲을 이루기까지는 끊임없는 수행이나 공부에 따른 깨침이 지속적으로 이어져야 한다. 궁극적 변혁은 궁극 실재를 깨달아 체득하는 과정이고, 그것은 바로 교육의 과정으로 드러나야 한다. 그 과정은 불교에서 말하는 자리행(自利行)에서 이타행(利他行)에로 나아감이다.
궁극 실재에 대한 ‘깨침’(메타노이아/해탈)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예수의 가르침과 석가의 가르침은 다르지 않다. 그래서 폴 니터(Paul F. Knitter) 교수는 『붓다 없이 나는 그리스도인일 수 없었다』(Without Buddha I could not be a Christian, 2009/정경일, 이창엽 옮김, 2011)는 책을 냈다. 틱낫한(Thich Nhat Hanh)은 『살아계신 붓다 살아계신 예수』(Living Buddha Living Christ, 1995/오강남 옮김, 2013))라는 책에서 붓다와 예수의 가르침을 하나로 아우르고 있다.
최근 길희성 교수는 『길은 달라도 같은 산을 오른다』(2013)는 책에서 닫힌 종교에서 열린 종교에로 종교 간의 소통을 중시한다. 선불교의 선사(禪師)인 베이커(R. Baker)는 “제가 『도마복음』을 미리 알았더라면 구태여 불자가 되어야 할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고 실토하기도 했다. 그래서 프린스턴 대학교 종교학 교수인 일레인 페이젤스도 “『도마복음』이 그리스도교 전통의 일부로 남아 있었다면 불교와 그리스도의 대화가 훨씬 쉬워졌을 것”(오강남, 2009)이라고 했다. 이처럼 도마복음서에 반영된 예수의 가르침은 심층에서 붓다의 가르침과 만나고 있다.
예수는 ‘깨침’을 향한 구도(求道)의 삶을 위해 “방랑하는 자들이 되어라”(Be passersby!)고 이른다. 이 말은 도마복음서에 나오는 어록 중 가장 짧은 구절이다. 주석가들은 『도마복음』전체를 통틀어 가장 대표적인 구절로 이 로기온을 꼽는다(김용옥, 2010). 짧은 경구는 짧은 만큼 함축적인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 말은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 알 길이 없다. 그래서 도마 예수의 살아있는 말씀은 훨씬 역동적이면서 순결한 감동을 준다. 여기 ‘방랑자들’은 복수이지만 도반들의 그룹 아이덴티티가 아닌, 개인의 내면적 주체성을 그 핵심에 놓고 있다. 그리고 여기 ‘방랑’이란 세상사에 연루되지 않는 ‘탈(脫)앙가주망'(disengagement)을 의미하기도 한다.
오강남(2009) 교수는 여기서 우리가 나그네가 되어 집을 떠난다는 것은 “우리의 인습적이고 일상적인 생활방식이나 사유방식을 뒤로하고 새로운 차원의 삶, 해방과 자유의 삶을 향해 출발함을 상징하는 것”이라 했다. 이것은 내적 자유를 향유하는 장자(莊子)의 ‘소요유’(逍遙遊)와 같은 것일 수 있다. 이 절(도마 42절)과 같은 맥락에서 예수는 “홀로이며 택함을 받은 이는 행복하나니, 이는 나라를 찾을 것이기 때문이라. 너희는 그곳에서 와서 그곳으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니라.”(Blassed are those who are alone and chosen, for you will find the kingdom. For you have come from it, and you will return there again.) (도마 49절)고 했다.
도마복음서에는 여러 군데(제16, 23, 48, 49, 75절)서 ‘홀로 됨’ 혹은 ‘홀로 섬’을 말하고 있다. 그만큼 ‘홀로인 자와 홀로 됨’(alone with the Alone)을 강조하고 있음이다. 모세도 그랬고, 예수도 광야에서 홀로 기도했다. 코뿔소처럼 혼자서 외뿔로 걸어가며 ‘독각’(獨覺)에 이른 것이다. 홀로됨을 실천하는 사람은 ‘나라’(천국)를 찾는데, 이 ‘나라’는 바로 우리가 나온 근원이자 우리가 돌아갈 궁극 목적지이기도 하다.
홀로 서는 사람은 누구보다 자기를 향한 내면적 각성(覺性)을 중시한다. 그래서 도마의 예수는 “누군가 모든 것을 안다 해도, 자기를 모르면 모든 것을 모르는 사람이다.”(One who knows everything but lacks in oneself lacks everything.) (도마 67절)고 했다. 도마에서 예수의 가르침은 궁극적 자기 발견이며 이것은 자신의 영적 고양을 안내한다. 노자(老子)도 “자기를 아는 것을 밝음”(自知自明)이라 했다. 공자도 “배움이란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것”(爲己之學)이라 했다. 불학에서도 인습적 지식(즉, 알음알이)인 ‘분별지’(分別智)를 경계하면서 내면적 성찰을 통해 본래의 나를 깨닫는 것을 중시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자신도 무지하지만, 자기는 자신의 무지를 알고 있다는 데서 다른 아테네 사람들과 크게 다르다고 했다. 너 자신을 알라! 너 자신을 모르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다.
같은 맥락에서 도마의 예수는 ‘생사의 갈림 길’을 이렇게 말했다. “만약 너희가 너희 내면에 있는 것을 끊임없이 산출해낸다면, 너희가 가지고 있는 그것이 너희를 구원하리라. 만약 너희가 그것을 너희 내면에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너희가 너희 내면에 가지고 있지 못한 그 상태가 너희를 죽이리라.” (If you bring forth what is within you, what you have will save you. If you do not have that with in you, what do you not have within you will kill you.) (도마70절)
기독교는 전형적으로 타력신앙의 범주로 분류되지만, 도마의 살아있는 예수는 타력신앙을 거부하고 있다. 신앙은 나 밖에로의 귀의가 아니라, 내 속에 있는 것의 발견이다. 하나님은 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이다(김용옥, 2010). 우리 안에 있는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속에 잠재해 있는 ‘신성(神性)의 씨앗’이다. 이 ‘신성’의 씨앗은 원래 우리 속에 내장되어 있으나, 그런 줄 모르고 미망의 어둠 속에서 살다보면 결국 고사(枯死)하고 만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너희 내면에 있는 것을 끊임없이 산출해 내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에게 인간 교육의 가능성과 필요성은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중용(中庸』첫 머리에서도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 해서 하늘이 명령하는 것이 이른바 ‘성’(性)이라 했다. 이 때 성(性)은 하늘의 지엄한 명령으로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품부되어 있는 ‘본래성’(本來性; human nature)과 같은 것이다. 불교에서도 원래 인간은 참으로 그러한(眞如) 심성의 바탕(心源)을 지니고 있으나, 밑도 끝도 없이 생멸하는 탐진치(貪瞋痴)에 끌려 살다보니 그 심원(心源)이 가려졌을 뿐이다. 마치 거울에 때와 먼지가 끼어 원래 투명했던 거울이 보이지 않게 되었으나, 그렇다고 사물을 비추는 거울의 본래성 자체가 훼손된 것은 아니다. 그래서 거울에 끼어 있는 때와 먼지를 부지런히 걷어내는 일(즉, 修行)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우리 속에 내재하는 ‘신성의 씨앗’을 살려내느냐 죽어버리게 두느냐의 문제는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깨침’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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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한 사람 한 사람 마다의 내면적 ‘깨침’을 중시하는 살아있는 예수의 가르침은 다시 이렇게 이어진다. “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마시는 자는 누구든지 나와 같이 되리라. 나 또한 그 사람과 같이 되리라. 그리고 감추어져 있는 것들이 그 사람에게 드러나게 되리라.” (Whoever drinks from my mouth will become like me; I myself shall become that person, and hidden things will be revealed to that person.) (도마 108절)
여기 “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마시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와 같이 되리라.”는 것은 도마복음서 13절에서의 도마처럼 예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말씀을 듣고 취한 사람이다. 제자가 깨침을 얻으면, 사제(師弟)의 관계보다는 같은 ‘도반’(道伴)이 된다는 것이다. 이 언명이 함의하는 정직한 결론을 도올 김용옥은 이렇게 해석한다.
“나 자신도 스스로 바로 나와 같이 되는 그 사람이 된다.” 예수의 말씀을 추구하는 자는 궁극적으로 예수가 된다. 예수는 바로 동시에 추구하는 자가 된다. 추구하는 자와 예수는 완벽하게 동일한 ‘하나 된 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나의 존재의 변혁(變革, transformation)이며, 기화(氣化, empowerment)이며, 신생(新生, renewal)이다(김용옥, 2010, p.349).
존재의 변혁을 통해 “예수가 나의 마음이 되고, 내가 예수의 마음이 될 때” 내게 감추어져 있는 것들이 예수에게서처럼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게 이 구절의 가르침이다. “(특수)교사가 (장애)학생의 마음이 되고, (장애)학생이 (특수)교사의 마음이 될 때” (특수)교육에서 진정한 소통으로서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이 존재하고, 감통(感通)이 일어난다. 여기 ‘마음의 소통’은 다시 육체와 영혼의 일원적 상호의존(interdependent)으로 이어진다.
예수가 말하길, “부끄러울 지어다. 영혼에 매달린 육체여! 부끄러울 지어다. 육체에 매달린 영혼이여!” ("Shame on the flesh that depends on the soul. Shame on the soul that depends on the flesh.") (도마 112절) 이 구절에 대한 도올의 해석이 탁월하다.
여기 “영혼에 매달리는 육체”나 “육체에 매달리는 영혼‘은 모두 도약의 계기가 없이 의존적 관계에 매달려 있는, 초라한 타성의 쳇바퀴에만 머물러 있는 모습들이다. 육체는 영혼으로 다 환원될 수 없으며, 영혼은 육체로 다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 그 독자적 영역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또 여기 거부되고 있는 것은 실체론적 사고와 환원주의적 사고다. 궁극적으로 육체와 영혼은 서로 상호의존적(interdependent)인 관계를 통하여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며 일자가 타자에게로 환원․흡수될 수 없는 것이다. ...(중략) 영혼과 육체는 서로가 서로를 현현시키며 궁극적으로 함께 구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즉, 영혼과 육체가 분화되기 이전의 ”하나 된 자“로서 우리는 회귀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박(樸)의 사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서구인들에게는 본 로기온 속의 예수의 사상이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김용옥, 2010, 도마복음한글역주3. pp.364-365)
위에서 ‘박’(樸)의 사상은 노자 『도덕경(道德經)』에서 도(道)는 ‘박’(樸)과 같은 것이라는 데서 따온 것이다. 이 때 ‘박’(樸)은 통나무처럼 나누어지지 않은 ‘전일성’(全一性)을 의미한다. 이 구절에서 오강남(2009)은 육체와 영혼이 상호의존적이지만 둘 다 하느님의 영(靈; spirit)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이 영과 육의 관계에 대해 동양철학에서는 포괄적으로 삼리(三理, 즉 生理, 心理, 哲理)의 섭생(攝生)을 말했다.
도마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제자들이 예수께 “그 나라가 언제 올 것입니까?”고 물었다. 예수가 답하기를, “나라는 너희들이 그것을 쳐다보려고 지켜보고 있는, 그런 방식으로는 결코 오지 않는다. 보아라, 여기 있다! 보아라, 저기 있다! 아무도 이런 말을 할 수 없을 게다. 차라리 아버지의 나라는 이 땅 위에 깔려 있느니라. 단지 사람들이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니라.”(It will not come by watching for it. It will not be said, 'Look, here it is, or Look there it is.' Rather the kingdom of the father is spread out upon the earth, and people do not see it.") (도마 113절)
앞에서 영혼과 육체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인 것처럼 여기 ‘아버지의 나라’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계’와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 이구절의 가르침이다. 다시 도올의 해석을 보자.
천국과 세속이 하나이며, 영혼과 육체가 하나이며, 하늘과 땅이 하나이며, 빛과 어둠이 하나라는 이 강렬한 주제는 당대 중동세계의 모든 이원론적 사유를 거부하는 일대 혁명 중의 혁명이었다.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을 들고 나온 선(禪)의 혁명보다도 더 큰 파문이었다(김용옥, 2010, p.369).
“천국이 바로 이 땅에 깔려 있다! 너희가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라”는 예수의 이 말은 결코 당대에 이해될 수가 없었을 게다. 아니, 지금도 이해되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일는지 모른다. 그래서 도마복음서는 나일강 상류의 항아리 속에서 1600년 동안 침묵 속에 숨겨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도올은 만약 도마복음서가 1세기 만이라도 더 일찍 발견되었더라도 또 다시 화형에 처해졌을 것이라 했다. 도마의 예수는 “천국은 존재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라는 것”을 우리들에게 일러주고 있다. 하늘나라가 하늘 어디에 숨어 있는 게 아니다.
예수가 “천국이 바로 이 땅에 깔려 있다!”는 것은 ‘지금 여기’ 우리들 속에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천국은 우리가 새로운 주체로 깨어날 때, 지금 이곳의 내 속에 현현(顯現)하는 것이다. 따라서 천국은 인간 내면의 교육적 주제다. 그래서 도마의 예수와 (특수)교육은 그 심층에서 만나야 한다. 이제 특수교육은 장애아동을 ‘나라’의 주체로 우뚝 서게 하는 과정으로 거듭나야 한다. 하늘나라는 내 속에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이게 『도마복음』의 (특수)교육적 함의다.(2013.11.01)